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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억 달러 돌파 감격의 눈물 흘린 박정희 “ 봐라, 되지않나 … 이제 시작” … “라면 만들 돈 좀 구해달라” JP 설득한 전중윤의 배짱, 서민 굶주림 해결에 큰 공헌

중앙일보 2015.07.31 00:44 종합 12면 지면보기
1977년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큰딸 박근혜(현 대통령),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앞줄 왼쪽)과 함께 서울 배화여고 교정에 설립된 ‘육영수여사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재봉실을 둘러보고 있다. 육 여사는 배화여고 16회 졸업생이다. 이 기념관은 배화학원 기성회장이던 전중윤 회장이 건립해 학교에 기증했다. [사진 삼양식품]


5·16혁명의 과업은 조국 근대화였고 근대화의 첫 번째는 경제발전이었다. 돈이 없어 배가 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제대로 된 자유가 있겠는가. 모두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이다. 이미 맹자가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라 말했다. ‘선 산업화 후 민주화’라는 근대화 전략에서 나와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이 통했다. 혁명계획서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해나갈 기관으로 경제기획위원회(뒤에 경제기획원)를 그려 넣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4> 박정희와 수출입국



 1960년대 초 우리나라의 산업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61년 8월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실업인들을 만나 애로점을 파악하고 격려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부산에 갔을 때다. 군납 생활용품을 활발히 생산한다고 알려진 한 제조공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공장을 둘러보니 생산품의 질이 형편없었다. 장병들이 여기서 만든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빠지기 일쑤여서 ‘탈모비누’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칫솔은 입안에서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솔이 전부 빠졌고, 치약통은 뚜껑을 돌리면 안 열리고 옆구리가 터져 치약이 삐져나왔다. 공장이라고 있는 것이 대개 그런 수준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실업인들의 집념이 싹을 틔워 갔다. 61년 어느 날 훗날 삼양식품 회장이 되는 전중윤(1919~2014)씨가 서울 태평로 정보부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판매 중인 인스턴트 라면 한 봉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라면은 값싼 영양식입니다. 우리가 라면을 들여오면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방에서 불침번을 서는 군인들 야식으로도 좋고 가정에서도 손쉽게 끓여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니까 그가 “라면 제조설비를 일본에서 수입해 들여올 돈 5만 달러를 구할 수 있도록 좀 도와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이미 라면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럼 알아볼 테니 좀 기다리십시오”라고 약속했다. 제일생명 사장을 지낸 전중윤씨는 점잖은 신사였다. 그가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갔다.



1977년 12월 22일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유공자를 포상하는 박정희 대통령. 무역의 날은 11월 30일이지만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한 이날 행사를 열었다.
 5만 달러는 당시 정부로서는 큰돈이었다. 수소문해보니 그런 외화를 갖고 있는 곳이 농림부뿐이었다. 근해 어장에서 잡은 생선을 일본에 수출해 번 달러였다. 나는 농림부에 “전중윤씨에게 라면 제조설비 비용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 식량문제 해결에 큰 공헌을 할 것이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농림부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농림부 장관은 전 회장을 불러다가 “이런 시원찮은 것을 왜 정보부장한테 얘기했느냐”며 오히려 기합을 줬다. 한참을 설득한 끝에 간신히 5만 달러를 빌릴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화가 부족해 외화 매입은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전 회장은 그 돈으로 일본에서 제조설비를 들여와 공장을 세웠고 한국 최초의 라면을 63년 9월 처음 출시했다. 그 이후 한 봉지에 10원짜리 삼양라면은 불티나게 팔렸다. 농림부에서 빌려간 5만 달러도 금세 갚았다. 쌀 한 톨이 아쉬웠던 시절, 싸고 간편한 라면은 굶주림 해결에 큰 도움을 줬다. 병영의 식단에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라면을 즐겨 먹는다.



 가진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국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깃발을 내걸었다. 62년 1월, 목표연도(66년)까지 수출을 1억1750만 달러로 늘린다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61년도 수출액이 겨우 4200만 달러였으니 1억 달러 수출은 꿈 같은 일이었다. 64년 12월 1일 박충훈 상공부 장관(훗날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권한 대행)이 박 대통령에게 “어제 날짜로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 소식에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봐라, 하면 되지 않느냐. 이제 시작이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장래를 내다보는 리더가 앞장서서 이끌어나간 결과였다.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한 11월 30일은 ‘무역의 날’로 제정됐다.



1973년 5월 16일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 보잉 747 점보 제트기의 첫 취항식에서 기념테이프를 끊고 있는 김종필 국무총리(왼쪽 둘째)와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왼쪽 셋째). 맨 왼쪽은 김신 교통부 장관, 조 회장 오른쪽은 곽상훈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장충식 단국대 총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그때부터는 부가가치 높은 제품을 수출해 돈을 벌자는 의욕이 한층 높아졌다. 65년부터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달 열렸다. 이 회의엔 정부와 여당을 비롯해 경제단체와 금융기관·종합상사·연구기관까지 1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수출 전망과 증대 방안을 보고받고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방안을 도출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나면 대통령은 회의장 주변에 진열된 수출상품을 일일이 살펴보며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이어서 오찬을 함께하며 기업인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기업인을 중히 여겼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전통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기업인들을 가장 선두에 세워 우대했다. 명분을 앞세우는 사(士) 위주였던 한국 사회에서 실용의 기업가 정신을 앞장 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낡은 의식구조를 뒤집자는 것이 바로 5·16 혁명의 정신이었다. 요즘엔 그 기업가 정신이 다소 쇠퇴하는 듯해서 아쉽다.



1983년 최종환 삼환기업 회장(오른쪽)의 세계건설협회총연합회(CICA) 회장 취임을 기념하는 축하연에 정주영 회장(왼쪽 둘째)이 참석했다.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1920~2002) 회장은 정부정책에 호응하면서 기업을 크게 키웠다. 운수회사인 한진상사로 사업을 시작한 조 회장은 우리 국군의 월남 파병에서 기회를 잡았다. 월남에 진출해 미군 군수품의 하역과 물자수송 사업을 따낸 것이다. 월남에서 막대한 외화를 번 조 회장은 69년 대한항공(KAL)을 정부로부터 인수했다.



73년 6월 내가 국무총리로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 갔을 때의 일이다. 대한항공은 71년 미주노선에 처음 취항했지만 유럽엔 아직 하늘 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퐁피두 대통령은 내게 새로 개발한 에어버스를 한국에 좋은 조건으로 팔겠다는 제안을 했다. 프랑스가 중심이 돼 독일·영국·스페인 등 유럽 4개국이 공동 개발한 에어버스가 잘 팔리지 않았을 때다. 당장 조중훈 회장에게 전화해 “빨리 프랑스로 날아오시라”고 했다. 조 회장과 함께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남프랑스 툴루즈에 있는 에어버스 공장에 가서 현장을 둘러봤다. 조 회장은 돈은 나중에 갚는 조건으로 에어버스(A300) 6대를 들여오기로 계약했다. 그 여객기가 대한항공이 크게 일어서는 데 발판이 됐음은 물론이고, 숙원사업이던 유럽 취항도 단숨에 해결됐다.



73년 10월 대한항공은 서울~파리 간 북극항로에 화물기를 취항했다. 그 시절 파리를 갈 땐 소련 영공을 피하기 위해 미국 앵커리지를 거쳐 갔다. 74년 4월 퐁피두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다시 프랑스를 찾았다. KAL 여객기가 취항 전이라서 에어프랑스를 탔는데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에 태극마크를 단 대한항공 화물기 한 대가 보였다. 김포에서 화물을 싣고 파리로 향하는 화물기였다. 그 태극마크를 보자 ‘아, 우리 국적기가 이 북극항로로 다니는구나’라는 감격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73년 닥친 제1차 석유파동은 이제 막 뜀박질을 시작하려던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원유 값이 뛰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불어났고 국내 물가는 급등했다. 어려운 시기에 전 세계를 누비며 살 길을 찾아낸 건 역시 실업인들이었다. 오일달러가 모여드는 중동시장에 뛰어들어 건설공사를 연이어 따냈고 중동특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동 진출의 개척자는 최종환(1925~2012) 삼환기업 회장이었다. 삼환은 73년 국내 건설사 중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다. 초기 중동 진출 기업들은 우리 근로자들의 땀 흘린 성실성 덕분에 현지에서 인정을 받았다. 75년 5월 사우디를 방문해 칼리드 국왕을 만났을 때 국왕은 “참 고맙고 놀라운 일”이라며 삼환기업을 칭찬했다. 



 내가 무엇이 그렇게 놀랍냐고 물으니 “밤 늦게까지 횃불을 켜고 일을 한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다니 대단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날 최종환 회장을 만나 “국왕이 밤 늦게까지 일을 한다며 당신 회사를 크게 칭찬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최 회장이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여긴 낮에는 너무 더워서 일을 못합니다. 사막 지대는 밤엔 기온이 내려가서 서늘해 일부러 낮에 안 하고 밤에 일을 하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79년 서거 전까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주재하면서 수출을 독려했다. 70년대 말 정부가 중점 육성해온 중화학공업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퍽 기대를 하셨다.



 박 대통령은 말년엔 장관들은 잘 만나지 않았지만 기업인들이 찾아오면 늘 즐겁게 맞이했다. 그가 지금 우리나라가 1조 달러 규모의 무역을 하는 것을 본다면 51년 전 1억 달러 수출 달성의 그날처럼 눈물을 글썽일 것이다."아,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고 있었는데 체념을 왜 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했던 것뿐이야”라는 박 대통령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박충훈(1919~2001)=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했던 제3공화국의 경제 관료. 64년 상공부 장관에 이어 67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올랐다. 이후 한국무역협회장을 지내다가 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당선되기까지 16일 동안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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