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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엘리엇의 창, 삼성의 방패

중앙일보 2015.07.31 00:02 경제 5면 지면보기
정경민
경제부장
‘소 잃기 전에 서둘러 외양간을 손보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안이 우여곡절 끝에 주주총회를 통과하자 불거진 목소리다. 천하의 삼성조차 외국 자본의 먹잇감이 될 뻔했을 정도로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장치가 허술하다는 걱정에서다.



 대주주가 가진 지분엔 일반주주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제’나 경영권을 위협 받을 때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싸게 주식을 살 권리는 주는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미국이나 유럽·일본은 진작에 도입했는데 국내에서만 규제하고 있다는 거다. 더욱이 상당수 국내 대기업이 마침 경영권 승계란 숙제를 안고 있다. 승계를 거듭할수록 지분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경영권은 지키려니 기업사냥꾼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롯데그룹의 형제간 경영권 분쟁 역시 국내 기업 지배구조의 취약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국내 기업에도 외국에선 구경하기 어려운 든든한 ‘방패’가 있다. 애국심 투철한 소액주주다. 웬만한 창으론 뚫기 어렵다. 이번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표 대결에서도 삼성을 지켜준 건 소액주주의 몰표였다. ‘내가 좀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국내 기업이 외국 자본의 제물이 되는 건 못 본다’는 공감이 소액주주를 결집시켰다.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에 길들여진 엘리엇으로선 이런 광경에 내심 식겁했을 거다. 소액주주는 평소 꿔다 놓은 보릿자루 대접을 받아도 외국 자본의 공격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똘똘 뭉쳐 국내 기업의 수호천사가 돼왔다.



 그렇지만 애국심에도 유효기간은 있는 법이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처럼 안면을 싹 바꾸는 일이 잦아진다면 유효기간도 짧아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나친 애국심 마케팅은 자칫 배타적 국수주의로 오해 사기 딱 좋다. 엘리엇에 놀라 주주 행동주의 펀드 전체를 ‘먹튀’만 일삼는 투기자본으로 싸잡아 매도하는 것도 길게 보아 삼성은 물론 국익에도 도움이 안 된다. 삼성은 글로벌기업이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앞으로도 뻗어나가려면 외국 자본을 배척해선 안 된다. 국내법에 따라 합병에 반대한 엘리엇을 ‘유대계’ 운운하며 인종주의적으로까지 폄하한 일부 언론의 태도는 제 발등 찍기가 될 수 있다.



 국내 기업의 ‘백기사’가 돼줄 후보군도 아직 두텁다. 단기 주가 차익보단 중장기 기업가치 제고에 더 관심이 많은 연기금이 대표적이다. 한데 국내 연기금은 그동안 주식투자에 소극적이었다. 굳이 위험한 주식에 손 안 대도 두 자릿수 수익률을 안겨준 예금과 채권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배당은 시가 기준으론 ‘코끼리 비스킷’밖에 안 됐다. 그러나 이젠 정기예금 금리 1% 시대가 됐다. 지난해 국내 상장사 시가 배당률은 1.69%밖에 안 됐는데도 한국은행 기준금리(1.5%)를 추월했다.



 연기금으로서도 수익률 방어를 위해 주식투자 비중을 늘려갈 수밖에 없다. 다만 연기금은 배당처럼 안정된 수입을 선호한다. 배당률만 높인다면 국내 기업의 우군이 돼줄 연기금은 수두룩하다.



 그러나 국내 10대 그룹 상장사의 시가 배당률은 여전히 1%대로 미국·유럽은 물론 중국 기업보다도 낮다. 그러면서 사내유보금은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리고 있다. 이 돈을 우군 확보에 쓴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묘수가 아닐까.



 국내 기업엔 외국에는 없는 최후의 필살기도 있다. 계열사끼리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배하는 ‘순환출자 신공(神功)’이다. 국내 10대그룹 대주주의 계열사 지분율은 1%미만이다. 그런데 거미줄처럼 얽힌 순환출자를 통해 대주주가 행사하고 있는 실질적 지분율은 50%가 넘는다. 차등의결권 덕에 7% 지분으로 40%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 포드 일가가 부러워할 정도다. 한데 순환출자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국내 대기업에 차등의결권까지 얹어준다면 무소불위(無所不爲)가 되지 않을까. 긴말 필요 없다. 한 표가 아쉬워 수박까지 싸 들고 전국을 헤맸던 표 대결 전의 절박했던 심정으로 주주와 소비자를 대하라. 국내 기업을 지킬 비책은 그 안에 있다.



정경민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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