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명복의 직격 인터뷰] 장피에르 슈벤망 레스푸블리카 재단 이사장

중앙일보 2015.07.29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슈벤망 이사장은 “단일국가도 아닌 유럽이 단일통화를 쓴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독일인이 그리스인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때 비로소 유럽은 단일통화를 쓸 자격을 갖춘 단일국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레스푸블리카 재단]


장피에르 슈벤망(76) 레스푸블리카 재단 이사장은 프랑스의 대표적 엘리트 정치인이다. 9선 의원의 관록을 지닌 그는 ‘직업이 장관’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장관직을 거쳤다.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에서 연구·산업장관, 교육장관, 국방장관을, 자크 시라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21권의 저서를 낸 슈벤망은 학구파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대안 정치’를 표방하고 2002년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리스 사태로 유럽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지난달 25일 파리에 있는 레스푸블리카 재단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단일통화는 잘못 들어선 길 … 고집하면 유럽에 미래 없다



- 그리스 위기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스 위기의 이면에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단일통화의 위기다. 유로를 단일통화로 사용하는 유로존에는 경제 발전 수준과 역사·문화가 서로 다른 19개국이 병존해 있다. 그리스는 유로 같은 강세 통화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나라다. 그리스의 디폴트(국가부도)와 그렉시트(유로존 탈퇴)를 막기 위한 최종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그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미봉책일 뿐이다. 근본적 문제는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 무엇이 근본적 문제인가.



 “1국 1통화 원칙의 훼손이다. 각국은 자신의 경제적 특성에 맞는 돈을 가져야 한다. 독일 마르크화는 독일에 맞는 돈이지 그리스나 스페인·이탈리아나 프랑스에는 안 맞는다. 이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단일통화에 대한 재협상이 없다는 것은 유럽의 민주주의가 고장 났다는 뜻이다. 지금 유럽은 지나치게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이 말했던 ‘유럽인의 유럽’, 즉 유럽의 이익을 지키고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유럽을 만들려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유럽의 토대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



- 그리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 걸로 보나.



 “그리스의 국가채무는 3200억 유로다. 국내총생산(GDP)이 2000억 유로인 그리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다. 지금은 반대하고 있지만 채권단도 결국은 일부 탕감 등 채무 재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리스가 유로보다 약한 통화를 갖기 전에는 근본적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 결국 그렉시트가 해법이란 뜻인데, 그러면 유로 체제 자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단일통화를 공동통화로 대체하면 된다. 역외 거래는 공동통화로 하되 개별 국가의 경쟁력 차이를 감안해 역내 통화 간 환율은 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단일통화를 도입하기 전에 있었던 유럽통화시스템(EMS)과 비슷한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경쟁력 회복을 위해 지금 유로존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임금·연금 삭감 등 긴축정책밖에 없다. 하지만 효과가 없다는 건 이미 그리스에서 입증됐다. 그리스의 GDP는 지난 5년간 25%나 축소됐다.”



- 유로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것 아닌가.



 “잘못을 했는데도 무시하고 그냥 가면 더 큰 잘못에 빠지게 된다.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이치에 맞다. 1988~89년 유럽은 유로라는 단일통화와 에퀴(ECU·유럽통화단위)라는 공동통화 사이에서 망설였다. 에퀴로 가자는 쪽은 에퀴를 달러나 엔처럼 대외거래에 사용하는 공동통화로 하고 에퀴와 각국 통화의 교환비율은 110%, 100%, 90%, 70% 등 각자의 사정에 맞게 조정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단일통화로 가자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아 결국 이 꼴이 됐다. 단일국가도 아니면서 단일통화를 쓴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독일인이 그리스인이나 스페인인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때 비로소 유럽은 단일통화를 쓸 자격을 갖춘 단일국가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랑스의 산업경쟁력이 약화된 것도 결국 유로 탓인가.



 “1945년 이래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프랑화를 평가절하했고 이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르는 전후 고속성장은 그래서 가능했다. 지금 프랑스는 환율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과거 프랑스는 자동차 분야에서 흑자국이었지만 지금은 적자국이다. 유로 같은 강세 통화로는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 회복이 어렵다.”



- 프랑스 경제는 사실상 끝났다는 얘기가 많다.



 “프랑스가 다 끝난 것처럼 얘기한다면 그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용수철 같은 나라다. 아직도 강점이 많다. 우주·항공, 사치품, 농식품, 제약 등에서 프랑스는 여전히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젊고 국토는 매력적이고 살기 좋다. 누가 뭐래도 상대적으로 숙련된 노동력도 갖고 있다. 프랑스 언론의 자기비하적 보도를 너무 믿으면 안 된다.”



- 영·미식 신자유주의에 대해 귀하는 매우 비판적이다. 문제는 대안 아닌가.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탈이다.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믿음은 시장에 대한 신화적 환상일 뿐이다. 모든 것을 수학공식으로 바꿔놓은 신자유주의에서 우리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참을 수 없다. 특히 금융자본주의는 미친 자본주의다.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는 금융자본주의의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자본시장은 국제교역 규모의 70배까지 불어났다. 실물보다 가상의 가치가 커지면 거품은 터지게 돼 있다.”



- 규제가 필요하단 뜻인가.



 “그렇다. 특히 자본 이동에 대해서는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이 주는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재벌과 국가 조직이 병존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개입주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국가가 경제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되 실제 경제 활동은 개별 기업의 자유와 책임에 맡기는 혼합경제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 사회당·공산당 등 좌파연합의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이 개입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선회한 장본인이란 점은 아이러니 아닌가.



  “동의한다. 미테랑 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80년대 초 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정책 선회에 강력히 반대했었다. 미테랑은 문학과 역사에 조예가 있는 큰 정치인이긴 했지만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많은 측면에서 16세기적 인물이었다. 그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정책 노선에 맞춰 오른쪽으로 선회함으로써 그 스스로 신자유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 프랑스 유권자들은 좌파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도,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어부지리로 극우파인 마린 르펜 국민전선(FN) 당수가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진 않는다. 프랑스 유권자들이 달갑지 않은 선택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앞으로 2년 새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르코지에 비해 올랑드가 차악(次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제3의 후보가 나올 수도 있다. 벌써 2017년이 된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만의 하나 르펜 당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프랑스 공화국의 가치는 종말을 고하는 것인가.



 “그런 가능성을 거부하는 강력한 힘이 프랑스에 존재한다. 나는 프랑스 국민의 정치적 자질을 믿는다. 영국이 경제, 독일이 철학이라면 프랑스는 정치라고 카를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았나.”



- 독일이 유럽의 리더가 됐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프랑스는 2등국 지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보나.



 “아니라고 본다. 프랑스는 유럽에 꼭 필요한 나라다. 유럽에는 다양한 나라들이 있다. 라틴 국가가 있고 게르만 국가가 있고 슬라브와 스칸디나비아, 브리태닉 국가가 있다. 다양한 유럽이 균형을 이루려면 강력한 프랑스가 필요하다.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은 독일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갖고, 핵 억지력을 갖고, 세계 문제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강한 프랑스를 갖는 것이 독일에도 이익이다.”



- 프랑스의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10%에 달한다. 지난 1월에는 샤를리 에브도 참사가 있었다. 프랑스가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것 아닌가.



  “프랑스의 정체성은 공화주의다. 인종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 공동체다. 프랑스에는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있다. 인종적으로는 혼혈이지만 공화국 전통을 통해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공화국에는 법과 원칙이 있고 이것은 무슬림을 포함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슬람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법은 존중해야 한다.”



- 미국의 세기는 끝났다고 보나, 아니면 더 지속될 것으로 보나.



 “앞으로도 상당 기간 미국은 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은 더 이상 아닐 것이다.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유럽이 재정비해 드골이 말한 ‘유럽인의 유럽’이 된다면 유럽은 미·중 대결을 막는 유용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균형자 역할은 고유한 문화와 생활 양식을 유지하며 거인에 의해 억압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나라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 2002년 귀하는 시민운동(MDC)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다. 2017년 다시 출마할 생각은 없나.



 “나는 프랑스인들에게 제3의 대안 정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싶다. 대안 정치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할 생각이다. 누가 대안 정치를 대표할 사람이 될지 미리 속단하고 싶지 않다. 2017년 다시 와서 물어보기 바란다.”



- 레스푸블리카 재단은 어떤 곳인가.



 “정책 중심의 싱크탱크로 2005년 내가 만든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각종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연구 결과를 책자로 발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자만 100권이 넘는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슈벤망은 …



1939년 프랑스 동부 벨포르 출생. 60년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졸업. 65년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73년 하원 의원(벨포르·9선). 81년 연구·산업장관. 83년 벨포르 시장. 84년 교육장관. 88년 국방장관. 97년 내무장관. 2002년 시민운동(MDC)당 대선 후보. 2005년 레스푸블리카재단 이사장. 2008년 상원 의원(벨포르). 『1914~2014, 역사에서 벗어난 유럽』(2013년), 『프랑스는 몰락하는가』(2011년) 등 21권의 저서.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