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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온라인 중앙일보 2015.07.28 00:01
[월간중앙]


비너스와 에로스, 사랑의 생로병사를 말하다

‘놀이’에서 비롯된 큐피드의 화살… 쉽게 사랑하고 사랑에 인생을 던진 신화 속 신들의 이기적 사랑은 거부하기 힘든 판타지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여신의 태어남을 축복하는 만백성의 환대와 설렘이 가득 담겨있지만, 애잔하고 쓸쓸하며 안타까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 양희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 김남주, ‘사랑은’ 중에서



작가 장 콕토(Jean Cocteau)는 사랑의 본질을 공포와 불안에서 찾았다. 그는 알았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떠는 일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곧/ 사랑을 받는다는 것,/ 한 존재를 불안에 떨게 하는 것”, “언젠가는 연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번민”(<사랑>)이라 노래한 장 콕토는, 사랑이란 곧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과 공포에 떠는 마음’임을 포착해냈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모던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먼저 연상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하는 불안’을 주변의 수많은 사례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학습한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닐까. 근대 이전의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랑의 본질은 일단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무턱대고 뛰어들고 보는 것이었다.



사랑을 ‘놀이’로 여긴 큐피드



잠이 든 큐피드의 모습은 간명하면서도 도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랑이 없어져버린 세계를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잃어버린 사랑의 신비를 다시금 되찾게 만드는 그림이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찾아보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끙끙 앓는 신들은 거의 없다. 신들은 ‘수줍은 고백’따윈 하지 않는다. 앞뒤 재지 않고 대상을 향해 돌진한다. 두려움 없는 사랑의 대명사인 제우스가 대표적이다. 제우스는 상대를 향해 예의를 차리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해주는 일이 없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기 앞에 놓인 ‘금지된 장벽’을 깨고 여인들과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제우스에게는 ‘로맨틱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기도 하다.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어내는 제우스에게는 그리하여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이나 ‘고백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감정’이 없다. 말하자면, 제우스에게는 내면이 없다. 액션이 전부인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과 가장 다른 점이다. 현대인은 액션보다도 ‘고백하지 못하는 내면의 말들’이 훨씬 많다. 그 말하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고, 슬픔에 빠지며, 각종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짓눌려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사랑은 제우스의 끝나지 않는 변신놀이처럼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카프카의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처럼 ‘우울한 열정’이다. 현대인에게 사랑은 너무도 어렵고 힘든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과연 처음부터 이토록 힘든 것이었을까.



카라바지오, <잠들어 있는 큐피드>, 1608



사랑의 대명사인 에로스, 혹은 큐피드에게 사랑의 본질은 ‘놀이’였다. 큐피드는 ‘맞기만 하면 사랑에 빠지는 화살’과 ‘맞기만 하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화살’을 둘 다 관장했다. 물론 그가 걸핏하면 쏘아대는 화살은 ‘사랑에 빠지는 화살’이었지만, 가끔 큐피드를 진노하게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사랑에 빠지지 않는 화살’을 쏘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다프네다. 큐피드의 노여움을 단단히 산 아폴로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화살’을 쏘고, 그가 첫눈에 반하게 된 다프네에게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화살’을 쏨으로써, 큐피드는 자신의 개구쟁이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정작 나는 사랑을 놀이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이런 발랄한 사유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큐피드는 ‘올림푸스 12신’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신화 속의 인물’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랑에 빠진 당사자에게는 사랑이 심각한 화두이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사랑은 ‘결과도 원인도 예측 불가능한, 영원한 놀이’처럼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니. 모든 사랑은 당사자에게는 비극이지만 바라보는 자에게는 희극일 수도 있으니.



에로스의 화살을 그린 그림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나는 카라바지오의 큐피드가 특히 사랑스럽다. 이 그림은 큐피드의 흔한 포즈, 즉 누군가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는 포즈가 아니라, 큐피드가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간명하면서도 도발적이다. 즉 큐피드가 잠들면 이 세상도 멈춘다. 큐피드가 잠들면, 이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일 것이다.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누구도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사랑이라는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답답해질까. 사랑마저 없다면,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삭막해질까. 큐피드의 활이 부러지고 화살은 멀찌감치 치워져 있는 이 그림은, 온갖 즐거움과 열망과 기쁨과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계의 절망적인 은유가 아닐까. 사랑이 없어져버린 세계를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잃어버린 사랑의 신비를 다시금 되찾게 만드는 그림이다.



비너스, 아름다움과 사랑을 노래하다



파괴와 증오의 화신 마르스는 신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비너스 곁에서 잠들었을 때만은 모든 갈등과 고통을 잊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듯 갈 곳 없는 영혼에 찰나의 휴식을 준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6



<비너스의 탄생>에는 여신의 태어남을 축복하는 만백성의 환대와 설렘이 가득 담겨있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는 자신의 연인 클로리스를 품에 안은 채 비너스가 어서 육지에 닿으라는 듯 입으로 바람을 만들어 불어넣고 있으며 계절의 여신 호라이는 비너스의 눈부신 나신을 누가 볼세라 황급히 망토를 들고 나와 여신의 몸을 감싸줄 채비를 하고 있다. 제피로스의 바람결에 나부끼는 여신의 망토자락조차 여신의 태어남을 호들갑스레 축복하는 것 같다. 정작 여신은 수줍다. 조신하게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고개를 살짝 외로 비튼 ‘비너스 푸블리케’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자세라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지니는 몸짓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다. 비너스의 몸짓에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아직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모르는 데서 나오는 한없는 겸손함이 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 하나하나도 여신의 아름다움을 축복하는 듯 설렘으로 들썩인다.



그런데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왜 저토록 슬퍼 보일까? 가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비너스, 영원히 이상화된 비너스가 이 그림 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듯하다.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할 뿐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비너스의 모습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비너스, 대상을 한눈에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가득한 비너스와는 거리가 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거침없고 제멋대로인 비너스와도 거리가 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애잔하고 쓸쓸하며 안타까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다. 실제로 피렌체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시모네타를 모델로 했다는 이 그림은 가질 수 없는 대상을 향한 하염없는 바라봄의 염원이 실려있는 듯하다. 보티첼리는 평생 시모네타를 짝사랑했고 그녀가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죽은 뒤에도 평생 그녀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누드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풀리지 않는 신비와 누구도 쉽게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함을 되새기게 해준다.



은사시나무 껍질을 만지며 당신을 생각했죠



아그배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서도



당신을 그렸죠 기다림도 지치면 노여움이 될까요



(…)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하늘이 우물 속 같이 어둡습니다

-조용미, <유적> 중에서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 1483



이 그림 속의 비너스는 사뭇 여유롭고도 애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가장 따뜻한 표정일 것이다. 전쟁의 화신 마르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비너스는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마르스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마르스는 결코 환영받는 신이 아니었다. 또 다른 전쟁의 여신 아테네가 ‘지혜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반면, 마르스는 파괴와 증오의 화신으로 늘 배척받았다. 그는 분명 신이었지만 신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해준 여신은 공교롭게도 사랑의 화신 비너스였다.



신들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헤파이스토스를 비너스의 짝으로 붙여준 제우스의 결정에 반기를 들며, 비너스는 보란 듯이 마르스와 밀회를 즐겼다. 파괴와 증오와 분노의 화신 마르스는 이렇게 사랑의 여신 곁에서 잠들었을 때만은, 그 모든 갈등과 고통을 잊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듯 갈 곳 없는 영혼에 찰나의 휴식을 준다. 이 사랑의 그림 속에는 어떤 고뇌도 갈등도 번민도 없어 보인다. 오직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달콤한 숨소리, 격정 뒤의 휴식, 기쁨과 희열의 향기만이 살아 숨쉰다. 잠든 전쟁의 화신의 머리 위로 빙빙 맴도는 말벌들이 어쩌면 이 두 사람을 괴롭히게 될 이후의 끔찍한 갈등을 암시하는 복선일지도 모른다. 행복하게 곯아떨어진 마르스의 머리 위를 뱅뱅 도는 말벌은 어쩌면 이 달콤한 사랑의 희열 뒤편에 도사린 고통과 불안의 기미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수많은 얼굴을 품은 브론치노의 비너스



1. 비너스와 마르스의 사랑은 금지된 열정이었다. 비너스의 남편 불칸은 아내에 대한 증오와 분노, 마르스에 대한 질투로 삶의 참혹함을 겪었다. 이렇듯 사랑은 질투와 탐욕, 광기와 분노를 낳기도 한다. / 2.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는 치명적이고 도발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친다. 동시에 금지된 쾌락, 사악한 욕망, 불길한 도발이 느껴지기도 한다.




야콥 틴토레토, <비너스와 마르스, 그리고 불칸>, 1551



외로운 예술가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비너스는 이제 자신의 사랑이 아닌 ‘타인의 사랑’에 축복의 기운을 내려주는 진짜 여신이 됐다.
비너스와 마르스의 사랑은 금지된 열정이었다. 불칸 혹은 헤파이스토스라고 불렸던 비너스의 남편은 뭐든 만들어내는 대장장이이자 위대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불칸은 아내의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그물을 만들어 두 사람의 밀회 장소에 설치해놓고, 두 사람이 사랑의 행위를 시작하자 현장을 덮친다.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내에 대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자신은 결코 안을 수 없는 아내를 독차지하고 있는 마르스에 대한 질투가 불칸을 이토록 참혹하게 괴롭힌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질투와 탐욕, 광기와 분노를 낳기도 한다. 카프카는 <비수>라는 시에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비수처럼 느껴질 때/ 날카로운 것으로/ 당신의 마음을 마구 휘젓고/ 가슴 에이게 한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불칸은 자신을 그토록 아프게 했던 아내 비너스를 분명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브론치노,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 1545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해답을 담고 있다면, 브론치노의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의 대한 모든 해답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사랑의 가장 추악한 면과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면이 모두 담겨 있다. 큐피드와 비너스가 장난스럽게, 그러나 도발적으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장면은 관람자의 눈길을 한눈에 빨아들인다. 브론치노의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진지하고 수줍은 비너스와는 정반대로, 치명적이고 도발적이며 카리스마가 넘친다. 어머니 비너스와 함께 있을 때는 거의 아기 천사 푸토들처럼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던 큐피드는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거의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 관람객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금지된 쾌락, 사악한 욕망, 불길한 도발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이 작품의 제목에 ‘알레고리’가 붙어 있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비너스는 한 손에는 큐피드의 화살을 들고 있고 한 손에는 사과를 들고 있다. 큐피드의 화살은 ‘사랑의 향방’을 놀이로 결정하는 신들의 애꿎은 장난기가 느껴지고, 사과에는 이보다 훨씬 풍부한 상징이 따라붙는다. 이브의 선악과로서의 사과라면(물론 이브의 선악과는 사과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이 사과는 ‘욕망’과 ‘지식’을 상징할 것이고, 트로이 전쟁에서 여신들끼리의 다툼의 도화선이 된 사과라면 ‘전쟁’과 ‘불화’를 상징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과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꽃잎을 던지며 미소 짓는 어린 아이는 ‘희롱’이나 ‘농담’을 뜻하고, 가시를 밟고 있으면서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어여쁜 얼굴로 화사하게 미소 짓는 소녀는 ‘기만’을, 괴로운 표정으로 절규하는 듯한 노파는 ‘질시’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미소 짓는 소녀의 모습이 독특하다. 꼬리는 뱀의 형상이고, 발은 사자의 형상이며, 한 손에는 심장을 들고 있고, 한 손에는 가면을 들고 있다. 상대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여인,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기 위해 천변만화한 변장술을 활용하는 여인의 복잡한 내면이야말로 사랑이 지닌 또 하나의 본질, ‘기만’일 것이다. 모래시계를 등에 지고 있는 남성은 시간, 즉 크로노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랑에는 이토록 많은 얼굴이 있지만 그 어떤 화려한 변장술도, 복잡한 심리전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의미일까. 이 그림은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성이며 ‘사랑의 수많은 얼굴’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화해와 용서, 애도와 찬미: 사랑의 궁극



라임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의상을 입은 비너스와 안키세스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느껴진다. 비너스를 쳐다보는 안키세스의 시선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같다.




에드워드 번 존스, <신이 빛을 비추다>, 1868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상의 여인들에게서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 여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모든 꿈과 이상을 담아 한 여인의 조각상을 빚어냈다. 그야말로 완벽한 여인, 어떤 결점도 없는 여인, 이상 속의 연인이었다. 이 외로운 예술가 피그말리온은 꿈꿨다. 이 조각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이 땅을 걷고,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나와 함께 눈을 감고 뜬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피그말리온은 남몰래 기도했다. 나의 아름다운 조각상 갈라테이아가 진짜 사람이 되어 저와 사랑에 빠지게 해주세요. 피그말리온은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각상이 행여나 추울까 봐 포근한 담요도 덮어주고, 아무도 엿보지 않을 때 그녀를 살짝 안아주기도 했다. 그에게 조각상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라 ‘그녀’였고 ‘당신’이었다. 그에게 갈라테이아는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빚어진 생명체였다. 비너스는 피그말리온의 은밀한 소원을 듣는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가여운 피그말리온이 어서 빨리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아니 그는 이미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 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겠구나. 비너스는 이 이야기에서 철저한 조연이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의 신화에서야말로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으로서의 본분을 톡톡히 해낸다. 비너스는 마침내 갈라테이아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갈라테이아는 이제 딱딱한 대리석에 갇힌 죽은 영혼이 아니다. 그녀는 드디어 ‘한 사람의 여자’가 되어 피그말리온의 사랑에 화답할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인간의 염원을 절절하게 표현한 이 이야기를 사람들은 오늘도 사랑한다. 번 존스의 그림 속에서 비너스는 차가운 대리석상에 축복의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자, 이제 걸어가거라. 자, 이제 너의 심장이 뛰게 될 것이다. 달려가 그에게 입을 맞추어주렴.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이제 자신의 사랑이 아닌 ‘타인의 사랑’에 축복의 기운을 내려주는 진짜 여신이 되었다.



윌리엄 블레이크 리치몬드, <비너스와 안키세스>, 1889



이 그림에서는 어떤 거대한 장벽이 느껴진다. 라임 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비너스의 의상은 눈부신 열망의 대상이자 그 자체가 견고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여신의 사랑을 탐낸 인간 남자 안키세스의 고뇌 어린 시선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같다. 내가 과연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불가능한 사랑이 용납될 수 있을까. 신과 인간의 사랑은 엄격하게 금지된 것이었다.



이 금지된 사랑의 장벽을 유일하게, 자신의 힘으로 뛰어넘은 인간은 오직 에로스의 연인 프시케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는 신비롭고도 무정한 남편 에로스의 비밀주의와 싸웠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딸에게 내어주지 않으려는 미래의 시어머니 비너스의 텃세와 심술을 뛰어넘었고, 인간과 신의 금지된 사랑을 주장하는 올림푸스 12신의 냉혹한 원칙을 뛰어넘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한 모든 장벽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안키세스에게는 프시케 같은 신중함과 인내심이 부족했다. 안키세스는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비너스의 약속을 어긴다. 그는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여신과 사랑을 나눈 남자가 있겠느냐고. 그러니 나는 세상 최고의 남자가 아니겠느냐고. 그는 마음껏 자랑하며 뽐내고 싶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여신의 아름다움은 치명적 유혹이자 맹독성의 위험이기도 했다. 안키세스가 ‘나는 여신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뽐내고 다니자 이는 급기야 제우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진노한 제우스는 안키세스에게 불벼락을 떨어뜨린다. 가여운 안키세스는 그만 다리를 절게 되고 만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미학은 기묘한 양면성에 있다. 신은 징벌만 내리지 않는다. 나쁜 것 뒤에는 항상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안키세스는 다리를 잃었지만, 늠름한 아들 아이네이스를 얻었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를 구한 영웅으로 자라난다. 도탄에 빠진 트로이를 부활의 왕국으로 이끈 아이네이스는 그 듬직한 어깨에는 절름발이 아비 안키세스를 둘러메고, 그 강건한 다리에는 아들을 매단 채, 당당히 트로이의 전사로 거듭난다. 안키세스의 금지된 사랑은 제우스의 불벼락을 맞았지만, 그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 아이네이스는 역사에 길이 남는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윌리엄 위터하우스, <아도니스를 깨우다>, 1900 오귀스트 로댕, <아도니스의 죽음>, 1888



비너스가 가장 떠들썩하게 만났던 불륜의 상대가 마르스였다면, 비너스가 가장 절실하게 사랑했던 연인은 바로 아도니스였다. 아도니스에게는 제우스 같은 신통력도 없고, 마르스 같은 파괴적 매력도 없었으며, 헤르메스 같은 재치와 유머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아도니스에게는 필멸의 존재만이 가진, 찰나의 순수성, 찰나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도니스의 아름다움은 곧 사라져갈 것이기에 더욱 절절한 것이었다.



아도니스는 사냥에 미친 젊은이였고, 비너스는 여신의 예지력으로 아도니스가 사냥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너스는 어떻게든 이 가혹한 운명을 바꿔보려 한다.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너스는 아도니스가 죽게 될 것을 염려해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려 한다. 비너스는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아도니스와 함께한다. ‘오늘은 제발 사냥을 나가지 말아달라’고 아도니스에게 매달려 아이처럼 조르기도 한다. 하지만 아도니스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누구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비너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도니스는 기어이 사냥을 나간다. 비너스가 ‘공포를 모르는 동물은 죽이지 말라’고 당부를 해두었지만, 아도니스는 지금껏 자신이 본 동물 중 가장 커다랗고, 무섭고, 두려움을 모르는 동물인 야생 멧돼지를 사냥하려 한다. 얄궂게도 그 멧돼지는 이제 ‘가버린 시절의 옛 연인’이 되어버린 마르스가 변신한 것이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공공연한 애정행각을 보고 타오르는 질투심을 느낀 마르스가 아도니스를 죽이려 한 것이다. 마침내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사나운 멧돼지의 공격으로 죽어버린 아도니스의 시체를 부여잡고 절규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아도니스를 깨우려는 비너스의 공포를 애절하게 그려낸다.



연인 ‘아도니스’의 죽음을 막지 못한 비너스의 슬픔



1. 비너스의 불륜 상대가 마르스였다면, 비너스가 가장 절실하게 사랑했던 연인은 아도니스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아도니스를 깨우려는 비너스의 모습은 애절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 2. 구체적 얼굴 생김새는 물론 표정도 없이 그저 아도니스를 안고 있는 비너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동원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절규하는 슬픔이 전해진다.




비너스의 슬픔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작품은 로댕의 작품이다. 로댕의 비너스와 아도니스에는 구체적 얼굴 생김새는 물론 표정도 없다. 그저 ‘안음’만이 있다. 그저 그 필사적인 포옹만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랑,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동원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절규하는 비너스의 슬픔이 전해진다. 비너스는 깨닫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려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또다시 시작되었음을.



일찍이 에로스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존재의 끔찍한 불안조차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신들 중 최고의 미남으로 알려졌던 아폴론은 요정 다프네를 사랑했지만, 에로스는 그가 사랑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사랑의 대상 다프네에게 ‘납의 화살’(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화살)을 쏘아버린다. 에로스의 장난기 넘치는 화살로 사랑의 향방을 가늠했던 그리스인들은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낙천적인 애정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여전히 ‘에로스의 화살’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사람들은 평소에 그토록 열렬히 주장하던 이상형과 전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딱 내 스타일’이라며 열광했던 사람들에게 극도의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현대인보다 훨씬 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인생을 던졌던 그리스 신화의 신들에게는 사랑의 탐색전, 밀고 당기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태움 같은 안타까운 정서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한 번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사랑의 여신 비너스마저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비너스는 자신의 아들 에로스와 사랑에 빠진 프시케에게는 ‘혹독한 시어머니’였고, 남편 헤파이스토스에게는 ‘바람난 아내’였고,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에게는 이루지 못할 소원을 들어주는 ‘사랑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아도니스에게만은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인’이었다. 비너스는 끝내 아도니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아도니스를 껴안은 비너스는 이제 사랑의 달콤함을 넘어 사랑의 비극성을 깨달은 여신이 되었다. 사랑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찾아오고, 우리가 결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은 채 떠나가버린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타인을 향한 끝없는 갈망이 사랑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훌쩍 성장한다. 그 사람의 그 어처구니없음을, 그 아무도 막을 수 없음을, 그 붙잡을 수 없음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므로.



정여울 - 1976년생.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침.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로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잘 있지 말아요> <마음의 서재> <시네필다이어리>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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