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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가 말하는 모든 것

온라인 중앙일보 2015.07.28 00:01
[월간중앙]


설렘과 호기심, 신비로움, 낭만성을 갖고 있는 사랑과 정념의 키스들… 사랑의 실루엣, 행위의 망설임, 욕망의 그림자로 비친 키스의 숭고함

키스는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인류의 불행을 경감시키고, 망망대해 같은 고독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키스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며 작품으로 탄생하는 이유다. 키스는 사랑의 불꽃을 일으키는 기적인 셈이다. 젊은이들이여, 망설이지 말고 첫 키스의 달콤함, 청춘의 특권을 누려라!



키스는 자기완결성을 가진 행위다. 살아 있는 느낌들을 촉진하고, 기쁨과 달콤함을 동반한 채 목적 없는 목적성을 향해 나아간다. 20세기 사진의 거장 로베르 두아노의 작품인 <파리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1950년).




입술은 말하고 사랑하며 먹는 일들을 수행한다. 세계를 빨아들이는 수렁이고, 말이라는 배를 세계로 띄우는 발코니! 입술은 리비도의 기원이다. 미소 짓고 “나는 널 사랑해”라고 말하며, 타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먹는다. 말하고 먹으며 키스하고 사랑하는 것, 그중 하나라도 없다면 삶은 균형과 조화를 잃고 비틀거릴 것이다. 말하고 먹고 빨며 자양분과 쾌락을 취하는 입술! 이것은 인생이 필요로 하는 충일과 즐김의 입구다. 입술은 미소 짓고 “나는 널 사랑해”라고 말하고, 그리고 키스를 한다. 사랑스러운 입술은 키스를 부른다. 키스는 불안과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주문, 쾌락의 꽃다발이다. 이것의 슬하에서 사랑은 싹트고 자라난다. 하지만 키스는 신체적 친밀감을 쌓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물학적 이익이 없는 텅 빈, 상상임신 같은 행위다.



키스의 전제 조건은 “나는 널 사랑해”라는 문형이다. 입술을 거쳐나간 이 말은 상대의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방적 통고다. 일방적 통고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말로 다해질 수 없는 복잡성이라는 점에서 그냥 내던져진 말이다. 내면에서 불쑥 솟구쳤다는 점에서 ‘충동’이고 사전에 의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측 불허의 것’이다. 그 문형은 특별한 전언을 실어 나르지 않는다. 그냥 말해지는 것, 해석이 필요없는 말이다. 차라리 시선이거나 한숨과 닮은 그 무엇이다. 이 발화는 능동도 수동도 아니라 단지 어떤 행동의 개시를 위한 몸짓이다. 능동[행동]은 이 발화 다음에 온다. 바로 키스다. 상대가 이 발화에 응답하기 전 신속하게 그 발화를 막으려고 상대 입술을 입술로 덮는 행위가 키스다. “‘난 널 사랑해’란 말에는 뉘앙스가 없다. 그것은 설명이나 조정, 단계, 조심성을 폐지한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216쪽] 문득 발화된 “나는 널 사랑해”라는 말에서 의미는 배제된다. “나는 널 사랑해”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실체적 선언이 아니다. 선언이 아니니까 그 누구도 구속하지 않는다. 의미를 전달하는 목적이 없는,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기류이고 징후다. 따라서 그것은 씨앗같이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것, 즉 아무 구속력 없는 말-놀음이다.



키스, 입술이 수행하는 텅 빈 행위



2014년 1월 1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연인들이 입맞춤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첫 키스를 기억하는가? 누구나 첫 키스를 한다. 분명 첫 키스를 할 때 심장은 펄럭거리고 피들은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이 그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첫 키스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내 경우도 언제 누구와 했던 키스가 첫 키스였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첫사랑이 뒤로 이어지는 뭇 사랑에 의해 지워지듯 첫 키스도 이어지는 무수한 키스에 의해 잊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사랑이 달콤한 것이라면 첫 키스 역시 달콤한 것이다.



“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냄새,/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는 생기의 방울들,/ 달콤한 성적(性的) 과일,/ 안뜰, 건초더미, 으슥한/ 집들 속에 숨어 있는 마음 설레는 방들,/ 지난날 속에 잠자고 있는 요들,/ 높은 데서, 숨겨진 창에서 바라본/ 야생 초록의 골짜기:/ 빗속에서 뒤집어 엎은 램프처럼/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 때.”[파블로 네루다, <젊음>]





한 시인은 이것의 달콤함을 두고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이라고 쓴다! 키스는 존재를 집어삼킨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단 하나 안타까운 것은 설탕 같은 키스들이 오직 젊은이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첫 키스는 달콤한 첫 성적 교합의 전조다. 성적 과실을 따내기는 전적으로 청춘의 특권이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은 “달콤한 성적 과일”를 따낼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본다. 젊은이들이 안뜰, 건초더미, 으슥한 데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장소들이 키스하기 적당하고 성적 과일을 따기 좋은 곳이라 그렇다.



오, 젊은이들이여, 망설이지 마라. 붉고 탐스러운 자두를 깨물 듯 청춘의 열광 속에서 다가오는 사랑을 깨물고 그 사랑의 달콤한 과즙을 마셔라. 젊음이 지난 뒤 설탕 같은 키스들과 사랑의 열락에 대한 청구서가 날아오리니, 젊음이란 야생 초록의 골짜기이고, 뒤집은 램프같이 “탁탁 튀며 타오르는 한창 때”이다. 당신이 젊었다면 설탕 같은 키스들을 만끽하라!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지불 유예된 ‘노년’을 담보로 잠시 동안 빌려 쓰는 시간이다.



동화에도 종종 키스가 나온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100년 동안 잠든 공주에게 키스하는 왕자의 얘기다. 1679년 샤를 페로의 동화집 <옛날이야기>를 통해 처음 알려지고, 그림형제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진 동화다. 왕과 왕비에게 공주가 태어나자, 두 사람은 요정들을 초대해 축하 파티를 연다. 초대받지 못한 한 마녀가 분노하며 공주가 16세 되는 해 죽는 저주를 내린다. 공주는 16세 되던 해 물레 바늘에 찔려 10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진다. 공주가 살던 성은 가시덤불로 덮인다. 이웃나라 왕자가 사냥을 하러 가다가 공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들어가 공주에게 키스한다. 왕자의 키스로 잠든 공주는 마녀의 저주에서 풀려나 깨어난다. 왕자의 키스는 100년 동안이나 가시덤불 속에 방치된 공주를 살려낸 ‘사랑의 묘약’이다. 이렇듯 동화에서 키스는 “그 전까지 추측하기만 했을 뿐 알지 못했던 영역, 비밀스런 환희 정원으로 가는 열쇠”[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102쪽]다. 마법의 주문을 해제한 왕자의 키스에서 드러나듯 키스는 운명의 봉인이자 봉인된 것의 해제다. 오늘날은 봉인된 것을 해제하는 ‘운명적’ 키스들은 보기 드물다. 땅과 하천이 오염되어 반딧불이들이 사라지듯 추악과 경박함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순진무구한 키스, 운명을 뒤바꾸는 키스, 진중한 키스는 사라진다. 경박해진 세상에 남은 것은 찧고 까부는 키스들, 사랑은 없고 쾌락만 있는 키스들, 기성품같이 흔해빠진 키스들뿐이다.



키스는 다른 신체의 삼킴이자 발명



우리가 첫 키스라고 믿는 입맞춤은 실은 세 번째다. 그 첫 번째 키스는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이다. 한 병원에서 엄마가 아기에게 수유를 하고 있다.




키스는 무엇보다도 다른 신체의 삼킴이자 발명이다. 이것이 키스의 제일의적이다. 키스는 다른 신체에 접속하고 그것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다. 키스는 영원히 잃어버린 것에의 향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일깨 운다. 키스는 영원히 사회화되지 않는 당신과 나의 사적 영역이다. 그래서 키스는 비밀스럽다. 첫 키스에 성공한 연인들은 마치 접착제로 두 사람을 붙여 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키스는 자기완결성을 가진 행위다. 키스에는 절정도 없고, 끝도 없다.



서른 해 전쯤 유럽 여행 중 파리와 베를린을 들렀을 때 공원에서 키스에 열중하는 많은 연인을 보고 놀랐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입술과 입술을 맞대고 떨어질 줄 모르는 연인들! 키스하는 연인들은 떨어질 줄 모른다. 그 길게 이어지는 단조로움에 지켜보는 사람이 먼저 질린다.



키스는 아무런 국면의 전환도 없이 키스로만 이어진다. “절정도 없고 욕망이 사라지는 종점도 없다. 만약 인간이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목욕하지 않아도 된다면, 연인들은 아마 영원히 키스만 할지도 모른다.”[스미스, 앞의 책, 97쪽] 키스에는 절정도, 방향도, 종점도 없으니까 연인들은 그토록 오래 키스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섹스는 절정과 욕망의 종착점이 분명하다. 키스는 다르다. 키스를 오래해도 애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키스는 아무런 생물학적 이익을 낳지 않는 공허함으로 이루어진다.

“키스 자체는 묘하게도 공허한 행위다. 마치 음식도 없는 식사라는 것이라고 할까? 우는 행위와 비슷하게 키스는 내적인 계기를 가지지만 외적인 이득은 없다. 섹스는 적어도 생식의 목표를 지향할 수 있으나 키스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스미스, 앞의 책, 99쪽]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행위라 해도 키스의 의미가 부정될 수는 없다. 키스는 살아 있는 느낌들을 촉진하고, 기쁨과 달콤함을 동반한 채 목적 없는 목적성을 향해 나아간다. 키스는 한번 입으면 다시는 벗을 수 없는 푸른 연미복이다.



사춘기로 접어들며 첫 사랑의 열병 속에서 첫 키스를 겪는다. 첫 키스는 인생의 수선(修繕)도 보수(補修)도 아니다. 뇌를 쪼개는 짜릿한 전율 속에서 치르는 창조다. 첫 키스는 우리 자신을 새로 빚는다. 첫 키스라고 믿는 키스는 실은 세 번째 키스다. 오래전 첫 키스를 치렀다. “우리는 세 번 키스한다. 엄마의 젖꼭지와, 나 자신과, 그리고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과.”[스미스, 앞의 책, 103쪽] 엄마의 젖꼭지를 빠는 것이 첫 키스다. 이것이 모든 키스의 기원이다. 그 키스로 영양 섭취와 쾌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붙잡는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일반적으로 첫 키스로 인식하는 키스로 사랑의 달콤함에 빠진다. 그러나 나 자신과의 키스는 씁쓸하다. 그것은 끝내 좌절하는 키스다.



키스는 두 사람이 육체화의 국면으로 접어들며 보다 깊어지는 관계의 예고다. 첫 키스는 첫 교합의 시작점이다. 키스는 조만간 이루어질 섹스에 대한 일종의 서약이고 서명이다. 연인 사이에서 키스가 생략된 섹스는 드물다. 키스는 섹스로 가진 전에 반드시 통과하는 문이다. 그 문을 지나야만 욕망의 완전한 충족이라는 천국에 도달한다. 실은 그 천국은 욕망이 설계한 하나의 환상,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키스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키스는 희귀하게도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다.



한 위대한 시인에 따르면 “사랑은 번개들의 충돌,/ 하나의 꿀에 제압당한 두 몸”이다. 사랑이 번개들의 충돌이고 꿀에 제압당하는 것임을, 연인들은 키스를 통해 실감한다. 키스는 꿀이거나 설탕이다. 사랑의 달콤함은 전적으로 키스에서 비롯한다. “키스를 하며 나는 그대의 작은 무한을 여행”을 한다.[파블로 네루다, <100편의 사랑 소네트―012>] 키스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심연을 탐색하는 무한 여행이다. 성숙한 여인의 키스, 그 무한 여행의 끝은 어디인가?



키스의 숭고함



키스의 핵심 요소는 사랑과 정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6일 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오미현 양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애욕으로 타오르는 입술이 몸의 어딘가에 달라붙을지 모른다.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 비로소 키스가 이루어진다. 인간 내면에 깃든 불가사의한 사랑과 애욕의 고통을 그린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한 대목을 떠올린다.

“이제 제 입술을 느껴 보세요. 제게서 가장 먼저 당신께 닿을 것은 제 입술입니다. 제 입술이 어느 곳에 처음 닿게 될지는 알려드리지 않을래요. 당신은 갑자기 어느 곳에선가 제 입술의 온기를 느끼게 될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제 입술이 당신의 어디에 닿게 될지 알 수 없도록, 눈을 뜨지 마세요. 이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곧 제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알레산드로 바리코, <비단>, 183쪽].





키스는 사랑의 씨앗을 발아시킨다. 정념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발화점이다. 정념은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그 정점에 섹스가 기다린다. 첫 키스 뒤 두 연인은 첫 섹스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첫 섹스가 지연되고 지체될 때 욕망의 충족도 유예된다. 고통은 그런 지연들로 인해 쌓인다. 고통은 아주 단순한데, 바로 욕망의 좌절과 유예에 따른 결과다. 새로운 날에 대응하는 신체적 과잉이 건강이듯 충족은 욕망을 채우고 넘치는 잉여의 작동이다. 첫 키스로 예고된 섹스가 지연되면서 “농축되어 넘쳐흐르며 벼락같이 후려”치는 쾌락들은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실연의 신호탄이고, 생식 가능성의 소멸 징후다. 첫 교합의 지연이 죽음만큼이나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첫 섹스의 좌절이 그 자체로 생물학적 죽음의 또 다른 국면임을 직관한다.



키스는 숭고한가? 키스가 갈증, 기대, 열망인 한해서 키스는 신비하고 숭고하다. 모든 키스는 ‘사이’에 있다. 객체와 주체 사이, 욕망과 금욕 사이, 덧없이 흘러간 시간과 다가올 미래 사이, 욕망의 치켜진 팔과 욕구의 내민 팔 사이에.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한쪽에는 욕망의 치켜진 팔이, 다른 한쪽에는 욕구의 내민 팔이 있다. 나는 치켜진 팔의 음경 이미지와 내민 팔의 음문 이미지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망설인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35쪽] 키스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루엣이고, 육체의 일이 아니라 육체의 실루엣이며,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망설임이다. 키스가 아무런 생식의 결과를 못 만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키스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그림자를 암시한다.



키스는 입술을 매개로 한 타자와의 접촉이며 육체적 친밀감의 한 극단을 이룬다. 첫 키스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여는 첫 경험이다. 입술은 인체에서 가장 얇은 표피다. 감각 뉴런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곳이다. 그렇게 특화된 입술을 타자에게 허락함으로써 타자가 내 일부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첫 키스는 유령의 배다. 그 배가 언제 왔는지 모른다. 배가 사라져갈 때 비로소 ‘아, 배가 다녀갔구’나 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키스는 유령적인 것이기에 상처, 버려짐, 고통을 낳지 않는다. 미망에 빠지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없다. 키스는 사랑과는 달리 아무런 불안과 회의를 동반하지 않는다. 세계를 유물론적으로만 보는 소비에트의 러시아 사전에 따르면 키스는 “순전히 기계적 견지에서 구강막의 상호 영향, 타액 생산의 증가, 특정한 신경 조직의 활동”[스미스, 앞의 책, 95쪽]이다. 이 정의가 어처구니없는 것은 키스의 핵심 요소인 사랑과 정념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스에서 정념을 배제하자 키스의 살과 뼈를 이루는 설렘과 호기심, 신비로움이나 낭만성도 휘발되어버린다.



키스라는 기적이 없었다면…



키스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줬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




키스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시인들은 사랑의 숭고성을 구현하는 키스를 시로 예찬하고, 화가들은 키스의 기쁨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클림트의 <키스>는 키스의 황홀경에 잠긴 두 남녀를 금빛 찬란한 색채로 표현한다. 그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몰아지경에 빠진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앳된 주인공의 입을 빌어 키스가 “수줍어 붉은 두 순례자와 같은 입술”의 일이라고 그 고결함을 찬미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는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두 남녀가 취하는 자세, 근육의 움직임, 육체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로댕의 <키스>는 사랑의 스캔들, 성행위의 발화,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에서 두드러진다. 남자 아래에서 키스를 받는 여자는 성적 황홀경에 도취해 몸이 흐느적이는 듯 보인다. 이것은 분명 섹스의 끈적거리는 전조(前兆)를 떠올린다.



반면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키스>는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가. 나는 키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브랑쿠시의 <키스>가 더 좋다. 대리석으로 된 두 남녀가 긴 팔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두 몸통을 휘감은 두 팔은 마치 그들을 묶은 밧줄 같다. 조각가는 두 사람의 두상과 몸통을 최소한도로 드러낸다.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의 두 인물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 완벽한 대칭형을 이룬 눈과 눈, 입술과 입술은 작은 틈조차 없이 밀착한다. 두 팔은 작은 빈틈조차 남기지 않고 혼연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를 과시한다. 각자 삶을 도생해온 두 남녀가 한 몸으로 합체한다. 두 몸이 한 몸을 이루었으니 두 마음도 한 마음일 테다. 브랑쿠시는 한 몸 한 마음을 이룬 두 개체를 통해 키스의 관능보다는 그것의 애틋함과 행복을 온전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키스의 본질로 고착된 목적 없는 목적성과 더불어 키스의 달콤한 자기충족인 면,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영원한 향수를 자극한다.



“상대방이 다가올 때 키스는 달콤한 만남을 가지는 두 얼굴 사이에서 유쾌한 각운의 형태를 취한다. 키스는 또한 형식성과 자유로움, 격식과 관능, 의식과 낭만의 특별한 시적 결합을 향유한다.”[스미스, 앞의 책, 97쪽] 키스는 음양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쁨의 추구다. 키스는 “즐거운 놀이, 유쾌한 숨바꼭질”[스미스, 앞의 책, 95쪽]이자, 모든 “신체적이자 형이상학적인 결합”[스미스, 앞의 책, 99쪽]을 낳는다. 키스가 없었다면 인류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삭막했을 것이다. 키스는 인류의 불행을 경감시키고, 망망대해 같은 고독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키스는 사랑의 불꽃을 일으키는 기적이다. 키스라는 기적이 없었다면 과연 지구가 생명들로 번성하는 행성이 될 수 있었을까?





글=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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