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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G] 세상사 엮어보기 - 거짓말 하지 않은 외교관 화이트

중앙일보 2015.07.23 18:48
“외교관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세계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신사다”



400년 전 영국의 외교관이자 시인이었던 헨리 우튼의 말이다. 미국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지난 19일(현지시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외교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서 다룬 주인공은 로버트 화이트. 그는 7명의 대통령을 거친 미국의 베테랑 외교관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그는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명예와 원칙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1980년 화이트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명을 받고 엘살바도르로 부임했다. 엘살바도르는 작은 나라였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모스크바-아바나-마나과로 이어지는 공산권의 침투에 다음 포스트가 엘살바도르가 될까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바로 옆 국가인 니카라과에서는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축출된 직후였다. 엘살바도르도 군부의 지지를 받은 과두정치가 지속되고 있었고 학생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카터는 화이트에게 급우 세력과 급진 좌파 사이를 조율해 시민혁명을 막도록 지시했다. 당시 그가 부여 받은 임무는 일반적인 외교관의 역할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화이트가 특별한 건 그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 놓고 말하길 좋아했고 그가 말한 것을 기록으로 남겨뒀다는 점이다. 대사관에서 비공개 브리핑이 있을 때도 그는 마이크로폰을 통해 보고를 녹취했다. 관료들이 비공개를 요구하자 그는 “절대 안 된다. 내가 말하는 모든 건 온 더 레코드다”라고 항의했다.



한번은 화이트가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 당시 국무부 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외교전문을 통해 화이트에게 주의를 당부했고, 화이트는 그럴꺼면 사임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키신저는 화이트의 반응을 듣고는 조용히 물러섰다.



화이트가 엘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때 상황도 비슷했다. 독재와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의 충돌이 매일 발생했고 총을 맞은 시위자의 시신이 사라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화이트는 당시 국무장관이던 사이러스 밴스에게 27쪽이나 되는 긴 보고서를 올렸다. ‘노디스(NoDis)’로 분류된 이 전문은 인가된 사람 외에는 열람할 수 없는 보고서로 1994년에야 공개됐다. 보고서는 “혁명은 막을 수 없다. 거스를 수 없다”는 문구로 시작해 엘살바도르의 시스템이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혁명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그는 “매일 노동조합 등에 관련된 수십 명의 10대들이 극우 테러리즘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있다”며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제언까지 했다.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인권과 원칙을 중시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1980년 11월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화이트는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인 딘 힌톤 대사는 엘살바도르 우익 세력과 미국의 관계 회복을 명령 받고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희생을 묵인했다. 카터 대통령 시기 ‘명분’상으로나마 중시됐던 인권 강조는 국익 앞에 후순위로 밀렸다.



화이트는 시민세력을 극좌나 극우 군사세력으로부터 분리시켜 정부와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 당선 후 엘살바도르 군사 세력은 활개를 쳤고 당시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집무실까지 침입해 회의 중이던 혁명세력을 쓸어버렸다. 레이건 정부가 엘살바도르의 상황을 묵인하며 상황은 악화됐다. 그 해 12월에는 교회를 다니던 미국 수녀 4명이 엘살바도르 공항에서 납치 당해 강간당하고 사살된 후 암매장됐다. 화이트는 자생적 혁명의 일환이라고 분석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수녀 살해사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며 레이건 행정부는 결국 인권 문제 등에 해결책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엘살바도르 문제는 미국이 소련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꼭 풀어야만 하는 상징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수녀 살해 사건의 수사를 위해 화이트를 다시 엘살바도르로 보내길 원했다. 화이트는 엘살바도르 군부가 수녀들을 공격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파견을 거부했다. 미 국무부는 화이트를 압박했지만 미국이 엘살바도르 군부를 지지하는 한 제대로 된 수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무부는 화이트를 설득하지 못했고 그를 해고했다.



화이트는 떠났지만 엘살바도르의 시민혁명은 점점 가속화 됐다. 수천 명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1981년 12월에는 중남미 역사의 치욕이라 할만한 만행이 발생했다. 엘살바도르군이 엘모조테 지역 마을에서 헬리콥터를 동원해 7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사살한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3살 아기와 할머니를 비롯해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남은 주민들은 교회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대량 학살이 발생한지 며칠 뒤 레이건 대통령은 엘살바도르 정부에 인권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며 경고했다. 하지만 폭력은 계속됐다. 1989년 11월 엘살바도르군은 호세시몬파나스 대학을 공격했고 6명의 예수회 사제 등을 공격했다. 1992년 엘살바도르의 좌파 혁명 조직인 FMLN과 보수 당인 NRA를 포함한 정부측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조지 HW부시 행정부의 지원 하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후 엘살바도르는 민주적 절차로 대통령을 뽑으며 화이트가 꿈꾸던 바를 이뤘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화이트는 세계 2차대전 동안 해군으로 복무했다. 그가 17살이 되던 해였다. 전후에는 2년간 대학을 다녔고 터프츠대의 플레처스쿨에서 학위를 받은 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외교관이 됐다. 화이트는 파라과이·니카라과의 독재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고 워싱턴과도 자주 충돌했다. 화이트는 은퇴 후에도 미국의 중남미 정책을 비판해 왔다. 1985년에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귀국길에 오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진 수행해 한국을 찾기도 했다. 그는 올해 1월 88세의 나이로 숨졌다.



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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