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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권력의 역사의식

중앙일보 2015.07.23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보균
대기자
반세기는 아득하다. 그 세월은 감흥을 일으킨다. 건국은 격동의 언어다. 하지만 이승만 행사는 평범했다. 17일 국립 서울 현충원의 현충관.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50주기(週忌) 추모식’이 열렸다. 진행은 간략했다.



 이승만의 삶은 장엄한 드라마다. 그의 생애는 서사시다. 하지만 추모식은 그 거대한 삶을 담아내지 못했다. 작은 강당의 행사는 조촐했다. 정의화 의장 등 국회의원 네 명이 참석했다. 야당은 없었다. 정부도 제대로 나서지 않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자랑스러운 국부(國父)를 국부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 추모의 외침에 박수가 나왔다. 하지만 역설로 다가온다. 우남은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숨졌다(7월 19일). 사후 50년 추도식이다. 우남에 대한 대접은 허술했다.



 이승만의 공적은 선명하다. 반일 독립 투쟁, 건국, 6·25 남침 저지와 반격, 반공포로 석방, 한·미 동맹. 토지개혁은 그가 만든 새 세상이다. 이승만의 과(過)도 뚜렷하다. 자유당 독재, 부정선거, 유혈 시위, 4·19 혁명이다. 공이 과를 압도한다. 우남은 과오를 인정했다. 4·19 직후 대통령 이승만은 부상자 병실을 찾았다. 그는 위로했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그는 대통령직을 떠났다. 그 장면은 이승만 드라마의 강렬한 반전이다.



 50주기 행사는 소홀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만 한 진실이 등장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증언이다. 그 회고는 역사 논란을 정돈한다.



 이승만의 하와이 생활은 1960년 5월 말부터다. 그는 살아서 귀국하지 못했다. 내막은 무엇인가. 오랜 통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이 환국을 막았다.” 하지만 그 기록과 기억은 잘못됐다. 거기에 과장과 억측이 섞였다. JP의 회고는 이렇다(중앙일보 7월 17일자 김종필 증언록).



 1962년 11월 최고회의 군사정권 때다.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장 JP에게 특명을 내렸다. “하와이에 들러 이 대통령을 만나 봬라. 조국에 돌아오시겠다면 정중히 모셔라”-. JP는 요양원에 갔다. 우남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박정희의 뜻을 전달했다. 미국인 요양원장은 난색을 표시했다. “병환이 중하다. 지금 비행기를 타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다.” 수행하지 못한 긴급 특명이다. 영원히 실천 못할 명령이 됐다. 우남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 2년7개월 뒤 숨졌다(90세). 요양원 그 병상에서다.



 통설의 근거는 외교부 문서다. 그 문서(박정희 의장 지시사항)의 작성 시기는 1962년 3월. 내용은 “이 박사는 정부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선 안 된다”고 돼 있다. 하지만 그 문서는 과장돼 전해졌다. 그때 담당자였던 원로 외교관(김영주 전 대사)은 ‘과장됨’을 말한다. 박정희 지시의 핵심은 ‘적당한 시기’ 귀국이었다.



 그 적당한 시기가 문서 지시 8개월 뒤다. JP가 특명을 받은 때다. 5·16 체제가 확고해진 무렵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우남 환국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그 시도의 진실은 현대사 격동 속에 묻혔다. 문서만 95년에 공개됐다. 그 내용을 이번에 JP가 밝힌 것이다.



 류석춘(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장) 교수는 이승만을 연구해왔다. 그는 “이 대통령의 귀국을 박정희 정부가 거부했다는 게 기존의 인식이고 통설이었다. JP 회고는 그것을 뒤집는 것이어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했다.



 JP의 증언은 역사의 화해와 전진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 두 대통령 간 역사는 단절돼 있다. 그 역사는 이어진다. JP는 기억한다. “박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존경해왔다.” 1965년 7월 23일 우남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공항에 나갔다. 한 달 전 한일협정이 체결됐다. 야당과 학생 시위가 거셌던 무렵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사를 썼다. 영결식에선 정일권 국무총리가 읽었다.



 조사는 “조국 독립의 원훈(元勳)”을 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후반부는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빈(海濱·바닷가)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로 이어진다. 그 환국 불발은 박정희의 비원(悲願)이 됐다.



 역사는 통합의 출발이다. 이승만 50주기는 그런 기회였다. 청와대는 놓쳤다. 박근혜 정권의 깃발은 비정상의 정상화다. 우남에 대한 역사왜곡은 비정상이다. 그 정상은 현대사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50년은 박정희의 비원도 새롭게 풀어줄 기회였다. 하지만 딸의 시대인데 그렇지 못했다. 추모식에 황교안 총리라도 참석해야 했다. 청와대 참모진은 빈곤한 역사의식을 드러냈다. 역사의 상상력은 창조의 바탕이다. 국민 단합은 역사의 공유로 확장된다. 그것으로 국정의 추동력은 커진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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