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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미생 김대리 → 원생 김대리

중앙일보 2015.07.23 00:02 경제 2면 지면보기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상서(32) 대리의 토요일은 숨가쁘다. 인천에 사는 그는 오전 6시 일어나, 서울 신촌에서 오전 9시에 시작하는 독서 토론회에 나간다. 오후 1시엔 종로의 영어학원에 간다. 점심은 이동 중에 해결한다. 독서 토론회는 인문학 지식, 영어는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서 한다. 영어학원을 마치고 회사에 나간다. 주말에도 돌아가며 근무한다. 이 대리는 “학원과 근무 일정이 겹치면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꾼다”며 “몸은 힘들지만 보람차게 산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대리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2시다.

무한경쟁 시대 공부하는 직장인들 … 너도나도 샐러리맨+학생=‘샐러던트’



 무한 경쟁 사회, 평생 직장 개념은 희박해지고 있다. 청년의 취업도 어렵지만,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 공부하는 직장인, 샐러리맨(salaryman)과 학생(student)의 합성어 ‘샐러던트(saladent)’가 점점 늘고 있는 이유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14일 직장인 347명을 대상으로 학업 실태를 설문조사해보니 학업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대답이 76.9%에 달했다. 4명 중 3명 꼴이다. 외환위기의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은 2003년 생긴 신조어 샐러던트는 10여 년 넘는 세월 속에서 더 확고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최근 물류회사로 이직한 박영일(32) 대리는 중국어 공부에 한창이다. 업무에서 중국어를 쓰는 일이 많다. 회사에서는 원어민 강사를 초빙해 중국어 수업을 연다. 박 대리는 중국어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울 강남에 있는 학원에 따로 다닌다. 중급 코스를 들으며 HSK(중국어능력시험) 3급을 준비 중이다. 최종 목표는 현지인과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인 5급 합격이다. 박 대리는 “열의를 가지면 충분히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평소 언어에 관심이 많아 자격증 취득 후에도 공부를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이승우 변화혁신연구소장은 “경제 위기를 거치며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소장은 “직장인 사이에서 ‘이제 더 이상 조직이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며 “20~30대 직장인은 과거 세대에 비해 공부를 통해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학생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학원 강의를 듣는 선생님도 있다. 김포 양곡고등학교 윤리 교사인 송대식(45)씨는 매년 인터넷 강의 수강과 교재 구입에 300만원 정도를 쓴다. EBS뿐만 아니라 메가스터디·스카이에듀 등 사교육업체의 유명 스타 강사의 강의도 챙겨 듣는다. 새벽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오전 1~2시까지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잔다. “요즘은 휴대전화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예전보다 편해졌다”는 송씨는 “내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성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1시간 수업을 위해서 최소한 5시간 이상 투자하는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평판이 좋다. 양곡고 2학년에 재학중인 최현영(17)양은 “인터넷 강의보다 선생님 강의가 훨씬 좋다. 우리 학교 윤리 과목에 1등급이 유독 많은 건 송 선생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학습은 업무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생까지도 뒤바꾼다. 회계사 권애경(34·여)씨는 2011년 남편이 영국으로 발령 나 직장을 그만뒀다. 출국을 앞두고 대학원을 알아보던 중 국내 기업의 영국 법인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졸지에 영국에서 샐러던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권씨는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직장·육아·학업을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시간이 부족해, 지금 돌이켜보면 그걸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학원 1년 차에 프랑스 명품업체 내부 감사직에 지원해 합격했다. 이직 후 권씨의 삶은 확 달라졌다. 연봉은 2배 이상 뛰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유럽 특유의 기업 문화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공부 결심을 하면 현재 상황을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고민은 합격한 뒤에 해도 된다”고 조언했다. 그의 남편은 파견 근무를 마치고 자녀와 함께 귀국했지만 권씨는 ‘역기러기’ 엄마가 돼 전세계를 누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만 공부하는 건 아니다. 네이버의 사내 병원에 근무하는 가정의학과 의사 이수익(32)씨는 오후 7시 마지막 환자 진료를 마치고 신촌으로 향하는 광역버스에 오른다. 오후 8시 30분 수업 직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매점에서 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이씨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의사가 전혀 딴 분야인 언론홍보대학원에 진학한 이유가 뭘까. 이씨는 “주변 사람이 대부분 의료인이라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며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회과학적 사고방식이 낯설지만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진료 틈틈이 학과 공부를 할 정도로 그는 학업 그 자체를 즐긴다. 이씨는 “인문학은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소통의 기술도 향상돼 내 직업에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시 공무원 윤모씨는 퇴근 후 독일어 학원에 등록했다. 업무차 독일에 다녀온 후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1시간 정도 독일어 공부를 하고, 주말에도 독일어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는 “자격증을 딸 생각은 없다. 딸이 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딸의 독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독일어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다.



 이승우 소장은 “업무와 관련된 공부가 아니라도 자신의 존재가치와 자존감을 찾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며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직장 생활의 와중에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과 배우는 건 휴식과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샐러던트의 증가는 기업도 환영하는 일이다. 서유순(57) 라이나생명 전 인사부사장은 “현재 업무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도 외국어 학습 등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대부분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열정적”이라며 “이들은 공부하면서도 본 업무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고 오히려 일처리 속도가 빠르고 부지런해 좋은 기업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 각부분이 세분화되고 전문성이 깊어졌다”며 “샐러던트의 증가는 시대 조류이며 기업은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인기 영어 강사인 유수연(43) 유스타잉글리쉬 원장은 “직장인은 기본적으로 지속적으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며 “업무량이 많아 각종 모임과 가족 행사 등을 다 챙기고는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막연히 ‘나도 공부나 한 번 해볼까’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걸 너무 많이 봤다”며 “목표와 기간을 분명히 정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재성 기자, 오경진 인턴기자 hongdoy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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