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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학예사 없는 이성자미술관 … 유족 “이럴 거면 왜 기증받았나”

중앙일보 2015.07.21 00:28 종합 22면 지면보기
노현주 진주미협지부장(왼쪽)과 이창희 진주시장이 경남 진주시립 이성자미술관 내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16일 개관한 이 미술관은 기획자 없는 개관전을 열고 있다. [진주=뉴시스]


관장도 학예사도 없는 미등록미술관, 지난 16일 개관한 경남 진주시립 이성자미술관이다. 행정·청소 직원과 청원경찰 등 미술관 상근자는 총 다섯 명이며 진주미술협회 회원 50명이 돌아가면서 전시장을 안내하고 있다는 게 진주시의 설명이다. “시에 처음 들어선 문화공간이라 아직 소요예산 파악이 안 돼 있어 운영비가 책정되지 않았다. 민간에 위탁할 가능성도 있다”고 시 관계자는 덧붙였다. 그래도 개관식은 열었다. 이창희 진주시장과 지자체 단체장, 시·도의원 등이 테이프 커팅도 했다. 이성자(1918∼2009) 화백의 유족들은 불참했다.

진주 출신 한국 첫 여성 추상화가
미술품 300점 등 기증 1년 후 별세
진주시 “운영비 아직 책정 안 돼”



이 화백은 세 아들을 두고 1951년 도불, 한국 첫 여성 추상화가로 자리 잡았다. 고향과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영롱한 추상화로 국립현대미술관, 니스미술관, 파리 그랑팔레 등에서 전시를 열었고, 프랑스 문화부에서 두 차례 예술문화공로기사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2008년 3월 고향인 진주시에 미술품 300여 점과 관련 자료를 기증했다. 약정서에는 이렇게 썼다. “나 이성자는 평생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미술작품을 고향 진주에 기증함으로써 천륜을 숭모하여 기리고 아름다운 진주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자 한다.” 약정에 따르면 진주시는 2014년까지 전문가 공모를 거친 예술적 건축물을 미술관으로 건립·개관키로 하고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기증작을 반환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화가는 세상을 떴고 미술관 건립은 지지부진하다가, 진주혁신도시로 본사를 옮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나서면서 올 초 완공됐다. LH는 24억여원(시비 4억원 포함)을 들여 혁신도시 내 공원 관리사무소로 쓰려던 건물을 설계 변경해 미술관을 건립, 시에 기부했다.



 이성자기념사업회(회장 신용극)는 유족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건립을 추진했고 개관을 서둘렀다며 반발한다. 기념사업회는 “공원 사무실용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높이가 낮고 장소가 협소해 미술관으로 적합하지 않다. 운영에 필요한 전문인력도 확보되지 않았다. 시가 약정서를 계속 위반하면 작품을 반환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진주시 측은 “이 화백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진주여고 후배이자 지역 복지시설 운영자인 정모(74)씨를 대리인으로 정해 건립·운영을 위임했다. 유족과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원로·작고 작가들의 작품 기증을 통한 미술관 건립은 그간 여러 지자체에서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 경기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강원도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은 단체장의 의지, 유족과 전문가의 적극적 참여로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선례를 만들고 있다. 천경자(91) 화백의 경우 전남 고흥에 기증한 작품 66점의 관리가 소홀하다며 2012년 반환받았다. 제주도도 물방울 화가 김창열(86) 화백의 작품 200점을 기증받아 도립김창열미술관을 내년 개관할 예정이다.



서울대 서양화과 정영목 교수는 “작품의 기증과 소장, 미술관의 건립과 운영엔 긴 안목이 필요하며, 유족과 전문가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렘브란트·터너가 그랬듯 우리 작가들 또한 사후 작품 관리에 대한 명확한 유언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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