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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산골 집성촌 동네싸움 해결한 비결은 …

중앙일보 2015.07.21 00:02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사건을 검토하다 보면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도 접하게 된다. 갈수록 늘어만 가는 그런 사건들에 지칠 때면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10여 년 전 지방 근무 때 일이다. 산골 집성촌(集姓村) 사람들 10명 가까이가 서로를 상해죄 등으로 고소한 사건을 맡게 되었다. 이웃이자 친척인 사람들끼리 토지 경계에 관한 다툼 중 한 사람이 자기 땅을 지나 이웃 땅으로 가는 물길을 막아버렸다. 밭농사를 짓는 데 금쪽같은 물길을 막으니 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온 마을이 두 패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주먹질까지 벌어진 것이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으니 벌금 몇십만원씩 부과하면 될 사건이지만 그렇게 하고 치우기는 싫었다. 특별 기일을 지정해 마을 분들 수십 명을 모두 나오시도록 해 놓고, 논문·판례를 샅샅이 뒤져 물길 이용관계에 관한 법리를 정리했다. 자료를 잔뜩 들고 법정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내가 검토한 내용을 설명하며 열변을 토했다. 나이 지긋한 국선변호인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충분히 이해했을 테니 이제 마을 사람들끼리 얘기할 시간을 달라시기에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날 기쁜 소식이 도착했다. 화해가 이루어져 서로에 대한 고소·고발은 물론 별도로 제기했던 민사소송까지 모두 취하했다는 것이다. 뿌듯한 기분이었다.



 지방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무렵 그 국선변호인 분이 인사차 들르셨다. 그 사건 생각이 나서 내가 정리한 결론대로 물길 사용 문제가 정리되었는지 물었다. 변호인은 망설이다가 씩 웃었다. 사실 그때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법리며 판례 등은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나중엔 아예 듣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그날 도대체 어떻게 해결된 것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날 내가 나간 후 침묵이 흐르다가 한 노인 분이 일어나셔서는 “서울서 온 젊은 분이 저리 애쓰는데, 이거 동네 망신 아니오? 그만합시다.” 그러시더란다. 다들 끄덕끄덕하더니 거짓말처럼 서로 악수하고 눈물 흘리며 모든 게 해결되었단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히 대단한 명답을 제시해 분쟁을 해결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누구 편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깔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는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법관의 일 중 가장 힘든 것은 판례 찾고 판결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신뢰를 얻는 일인 것 같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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