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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국정원, 흑역사의 굴레 잊지 말라

중앙일보 2015.07.21 00:03 종합 29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기자
국가정보원 직원 사망 사건이 정치권을 달군 19일 밤 국정원발(發) 보도자료가 기자들의 e메일함에 도착했다.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제목에 23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이었다. 발신자는 ‘국정원 직원 일동’. 이런 글을 발표한 것은 1961년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창설 이래 처음이다.



 “(숨진) 직원은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 매도에 분노하고 있었다” “사이버 작전 내용을 모두 공개하라는 주장은 국정원이 정보기관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 “국가 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책임 또한 따라야 한다”….



 표현 하나하나에 울분과 억울함이 묻어났다.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중앙정보부 시절 부훈),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현재의 원훈)이라는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는 그들이 ‘무명’의 짐을 벗어던지고 ‘양지’로 뛰쳐나온 모습이었다. 54년 만의 첫 집단행동에 대해 국정원은 “유서 자체를 부정하고 타살설까지 제기하며 고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폄하하려는 움직임에 공분을 느꼈기 때문”(대변인실 관계자)이라고 설명했다.



 야당은 문재인 대표가 나서 “국가정보기관이 스마트폰 해킹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야당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국정원으로선 펄쩍 뛸 만큼 분한 일이다. 국정원은 또 “35개국 97개 기관이 같은 프로그램을 구입했으나 자국의 정보기관을 나쁜 기관으로 매도하고 근거 없는 의혹을 쏟아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억울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억울함에 국민이 선뜻 공감하지 못하는 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된 국정원의 ‘흑역사’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도청팀을 운영했음을 실토한 2005년의 불법 감청 파문, 현재진행형인 2012년 국정원 심리전단의 비방 댓글 파문 등이 그 단면들이다.



 20일 여당에서도 “국정원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업자득, 대선과 총선을 앞둔 2012년에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건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맨 것”(김태호 최고위원)이라는 발언이 나왔다.



 국정원 직원의 죽음은 뇌관이다. 하지만 국정원과 여야 정치권이 감정적으로 대응할수록 ‘쇠뿔을 고치다가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를 범할까 국민의 우려가 크다. 그건 “유능한 안보 정당이 되겠다”는 새정치민주연합도, 불법 감청 없는 정부를 강조하는 정부·여당이 원하는 그림도 아닐 것이다. 냉정해져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차피 앓아야 할 홍역이라면 국회에서 잠자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나 대테러방지법 등 법 정비도 함께 논의돼야 할 것이다.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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