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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선 싱가포르 교수가 창업 강의 … 북한 배고파 쓰러질거란 기대 접어야

중앙일보 2015.07.17 01:19 종합 5면 지면보기
지난 3월 평양의 한 강의실에서 싱가포르 교수가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가젤과 사자’ 이야기를 꺼냈다. “가젤은 생각합니다. ‘내가 천천히 달리면 사자한테 잡혀 먹힐 거야.’ 사자도 생각합니다. ‘내가 가젤보다 느리면 굶어 죽을 거야.’ 누구든 결국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경제 발전 고민하는 김정은

북한이 2009년 11월 30일 전격 단행한 화폐 개혁은 신구 화폐를 1대 100 비율로 교환해 주는 조치였다. 이를 통해 북한 당국은 숨은 돈을 회수해 중앙 집중적 계획 경제를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물가 폭등으로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다. 당시 새로 발행된 북한 화폐 중 최고액인 5000원권에만 김일성 전 주석의 얼굴이 담겨 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강의 제목은 ‘외국 사업가들과의 파트너십’이었다. 싱가포르 민간단체인 조선교류(Choson Exchange)가 북한의 창업 꿈나무들을 상대로 했다. 조선교류는 지난 14일 페이스북을 통해 평양 강의를 소개하면서 “참석한 북한 사업가·학자·정책입안자들은 ‘가젤과 사자’ 이야기에 주목했다”며 “북한이 외국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 손에 핵을 쥔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다른 손으론 ‘경제 발전’을 꾀하고 있다.



 배급제의 부족함을 장마당(시장)이 채우며 체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북한 당국도 내부 개혁을 통해 나름의 경제 발전을 고민하고 있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동국대 고유환(북한학) 교수는 “1950년대 전후(戰後) 평양 재건을 위해 쓰였던 구호인 ‘평양 속도’가 최근 북한 매체에서 부쩍 많이 언급되고 있다”며 “북한이 ‘우리식 사회주의’뿐 아니라 ‘우리식 경제발전’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정기적으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는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배가 고파 쓰러질 거라는 기대는 접는 게 맞다”며 “이제 현실적인 대북정책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북한은 유엔·미국의 대북 제재와 남측의 5·24 제재망을 피해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외교관계가 있는 시장경제 국가들로부터 출구를 찾고 있다. 이들에게서 창업·투자 연수를 받거나 외화벌이를 위해 중국에서 투자설명회를 하고 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조선교류 등 북한이 정치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민간단체와 손잡고 자본주의 경제를 강의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조선교류는 지난해 10월 북한 관계자들이 베트남 시장을 둘러보며 한국 가수 싸이 캐릭터 인형을 살펴보는 사진도 공개했다.



 북한의 외화벌이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 12일 유엔 산하 세계관광기구(UNWTO)와 양해각서를 맺고 관광객 100만 명 유치 목표를 제시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소비자 만족’까지 강조하고 나섰다. 노동신문은 지난 14일 김정은이 평양 락랑위생용품공장을 찾아 “사용자(소비자) 반영(반응)이 좋을수록 그들이 무엇을 더 요구하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이런 지도 아래 북한 경제 관리들도 해외의 경제전략 배우기에 나섰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가 운영하는 캐나다·북한 지식교류협력 프로그램(KPP)은 “(7월) 13~20일 북한 경제학습단을 이끌고 인도네시아를 방문한다”며 경제학습단에는 북한 대외경제성 등의 관리와 김일성종합대 교수 등 14명이 참가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인 NKNews의 채드 오캐럴 편집장은 “북한 경제의 다이내믹스는 살아 있다”며 “(대북 정책에서) 이제 한국이 틀 밖으로 나가 창의적 생각을 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경남대 김근식(북한학) 교수는 5·24의 출구를 찾기 위한 ‘우회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5·24 조치를 꼭 껴안고 있지만 말라.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북한이 어떤 조치를 할지 여부는 북에 맡겨라. 대신 우리는 자유로워진 두 팔로 북에 교류협력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변화도 감지된다. 지난 4월 국회에서 5·24 제재에 대해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해제가 가능하다”고 했던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석 달 뒤인 지난 14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북한이 사과를 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익재 팀장, 정용수·전수진·유지혜·안효성 기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왕웨이 인턴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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