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시평] 바이러스와의 전쟁서 밀리는 인간사회

중앙일보 2015.07.14 00:24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명자전 환경부 장관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
메르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 신종 감염병 공포가 여전하다. 지난 5월 20일 첫 환자 확진 이후 거의 모든 행사가 취소되는 가운데 6월 8일 서울 세계과학기자대회가 개막됐다. 때가 때인지라 메르스 특별 세션도 열렸다. 과학 저널리즘 세션도 이채로웠다. “내일 내가 메르스 기사를 쓴다면 무엇에 초점을 맞출 건가”란 질문을 주고 두 가지 답 중 하나를 골라 편을 갈라 앉게 했다. 답은 “한국이 메르스 사태(outbreak)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바이러스 생물학·역학(疫學)·역사는 어떤가” 중 양자택일이었다. 옵서버로 참석해 판세를 보니 60대 20이었다.



 다음엔 양측의 논거를 물었다. 첫째를 택한 쪽은 “돌발 사태에 대한 대응이 중요한데 과학기자의 임무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째를 택한 쪽은 “신종 바이러스 감염의 실체가 무언지 취재해야 패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측이 동의한 건 정보를 콘텍스트에 맞게 제공해 대중의 합리적 판단을 이끄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전쟁사 속의 병원균의 파괴력은 놀랍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에서는 전투에서 사망한 전사자보다 전염병 사망자가 더 많았다. 2차 대전에서 역전된 건 DDT 덕분이었다. 16세기 초반 중미의 아즈텍(Aztec) 제국이 스페인 원정군에 함락된 것은 황제를 포함해 아즈텍족만 골라 죽인 천연두 때문이었다. 2000만 명의 멕시코 인구는 100년 만에 160만 명으로 줄었다. 16세기 초 스페인 군대(168명)에 의한 잉카족의 멸망도 실은 천연두 바이러스가 해치운 일이었다.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이후 북미 인디언은 95%가 사라졌다. 이역만리 유라시아에서 새로 유입된 병원균이 면역과 유전적 저항력이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희생시킨 것이다.



 근대사의 주요 유행병은 페스트·콜레라·천연두·결핵·말라리아·홍역·인플루엔자다. 그 특징은 동물에서 유래해 사람끼리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9000년 전부터 소·돼지 등을 가축화하면서 동물이 앓던 병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아왔고 인체에 적응한 바이러스로 변이된 것이다. 최근 몇 차례의 구제역(口蹄疫)과 2008년 조류인플루엔자(H5N1)는 각각 9000억원과 6000억원의 피해를 줬다.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의 공격과 방어 경쟁은 치열하다. 병원균은 기침 등의 증상을 통해 다른 숙주로 침입한다. 물·공기는 물론 모기·벼룩·이 등에 무임승차해 세를 늘린다. 인체는 감염되면 열을 내 병원균을 죽인다. 백혈구 등 면역체계를 작동시켜 무찌른다. 항체를 만들어 다시 걸리지 않게도 한다. 백신 덕분에 천연두는 1979년에 사실상 근절됐다(세계보건기구).



 그렇다고 병원균이 마냥 포기하는 게 아니다. 항체가 헷갈리도록 항원을 변화시키거나 신종으로 진화를 거듭해 인체 면역성을 무력화시킨다. 인플루엔자가 변이가 심하다. 요즘은 홍콩독감이 돌고 있다. 사상 최악의 스페인독감은 1918년부터 5억 명 감염에 50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은 유럽의 3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여러 해 동안 냉해 등 기상이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병원균은 인류의 농경생활·도시화·교역 등을 통해 전파 수단을 확장시켰다. 요새는 1년에 30억 명을 실어 나르는 항공편으로 급속 전파된다.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는 99년 국제 항공편으로 미국에 들어가 2800명 감염에 1100명의 사망자를 냈다. 사스(SARS CoV)는 2002년 중국에서 37조원의 피해를 줬다. 2009년 신종 플루(H1N1)는 미국에서 유행한 지 한 달 만에 34개국으로 확산됐고, 수십만 명 감염에 3만 명이 사망했다. 에볼라는 2014년에 창궐해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1만 명 사망에 300억 달러의 피해를 냈다. 올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종 감염병은 152건, 지난해 대비 36% 증가다.



 21세기 세계화·도시화·고령화·기후변화는 바이러스에게는 기회고 인간에게는 위기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는 기후변화 관련 보건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신종 건강 위협에 대한 예방과 적응 등 대응 시스템 구축이 목표다.



 이미 보건 분야는 국방·에너지·식량에 더해 글로벌 안보 차원으로 부상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인간사회가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은 메르스 사태는 기존 시스템이 보건안보(Health Security) 차원의 선제적 대응에 역부족임을 드러냈다. 질병관리본부의 예방 기능 강화가 시급하다. 일이 터지면 허둥대는 대증적(對症的) 대응에서 나아가 리스크 관리 차원의 연구와 정책을 강화하고 인적·물적 자원의 통합적 활용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건안보에 만전을 기해 신뢰를 얻을 때 국민이 안심하고 사회가 안정될 게 아닌가.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