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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후락 그자, 김대중 납치 저질러 놓고 보고” … JP “윤필용 사건 뒤 위기 몰린 HR, 제 발등 찍은 잔꾀”

중앙일보 2015.07.13 00:39 종합 12면 지면보기
1971년 10월 23일 김대중 의원(오른쪽)이 국회 본회의에서 ‘10·2 항명 파동’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다. 김종필 국무총리(왼쪽)와 신직수 법무장관(뒷줄 오른쪽) 등이 출석했다. 10·2 항명 파동은 공화당 의원들이 주도해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가결한 사건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국무총리 시절인 1973년 8월 초 나는 농수산부 장관과 전국의 목장을 둘러보며 낙농 실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8일 늦은 오후,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데 황인성 총리실 비서실장(1926~2010·육사 4기·훗날 국무총리)이 전화를 했다. “김대중씨가 일본 도쿄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됐다”는 보고였다. 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김대중씨가 미국과 일본을 돌아다니며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하고 한민통(韓民統:한국민주통일연합)이라는 반정부 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오후 김정렴(91)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최초 보고를 받았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6> DJ 납치사건



 나는 걱정이 됐다. 만일 한국의 공권력이 백주 대낮에 도쿄에서 사람을 납치했다면 주권국가인 일본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국교 단절과 같은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김대중씨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8월 13일 밤 또 연락이 왔다. 충남 서산 일대 목장을 둘러보고 느지막이 온양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였다. 밤 11시, 자고 있는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건 추이를 따라가면서 수시로 내게 보고하던 황인성 실장이었다. “8일 행방불명됐던 김대중씨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 나타나 지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가 오후에 박정희 대통령을 뵈었다. 박 대통령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대뜸 “임자는 몰랐어?”라고 물었다. 내가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아 글쎄, 이후락(영문 이니셜 HR) 그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 놓은 후에 나한테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거나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했다. 김대중씨 납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이후락은 김대중씨를 서울에 데려다 놓고 나서야 박 대통령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또 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탄식했다.



 이후락은 정보부에서 파견 나간 김재권(1926~94·본명 김기완) 주일 공사에게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김대중씨 납치를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아예 김대중씨의 손과 발에 쇠뭉치를 달아서 바다에 집어 던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었다. 배 위의 현장에서는 공작원들이 차마 김대중씨를 죽일 수 없어서인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해탄을 건널 때는 중앙정보부의 대북 공작선 용금호가 동원됐다. 김대중씨는 자기를 태운 배가 바다를 건너는데 미군 비행기가 빙빙 돌면서 보호해주는 바람에 살아나게 됐다고 회상했는데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깜깜한 한밤중 현해탄에 갑자기 비행기 한 대가 1000t짜리 배 한 척을 찾아내 그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대중씨 납치 사건은 다음 날부터 국내 조간신문이 일본 경찰당국의 발표를 인용,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TV·라디오들도 매시간 경쟁적으로 이 사건을 다뤘다. 국내에서도 여야가 모두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초 대학가에서 들고 일어나 납치사건 해명과 중앙정보부 해체를 외쳤다. 한·일 간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래 최대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결국 총리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73년 8월 피랍 닷새 만에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씨에게 부인 이희호 여사가 약을 발라주고 있다.
 10월 31일 오후 6시 청와대로 올라갔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사안(事案)이 중대하니 아무래도 도쿄에 직접 가서 일본 총리를 만나 사과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후락 부장이 “거기는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가라앉을 겁니다”라고 끼어들었다. 화가 불같이 솟았다. 나는 “당신은 가만히 있어.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만들어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며 야단을 쳤다. 지그시 눈을 감고 얘기를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은 나에게 “임자 말이 옳아. 다녀오시오”라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청와대에 들어가 일본 총리에게 전달할 박 대통령의 친서를 받아 왔다. 삼청동 총리공관에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용식(1913~95) 외무부 장관, 김정렴 비서실장과 방일(訪日) 대책을 논의했다. 내가 이후락에게 “일본으로 사과하러 가는 마당에 사건경위와 진상이라도 알고 가야 할 거 아니오”라며 구체적인 사건경위를 물어봤다. 이후락은 “나는 잘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당신이 이따위 짓을 하고 나는 일본에 가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데 미안하지도 않아?”라고 소리를 쳤다.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이후락에게 다가가 덤벼들려고 했다. 옆에 있던 김정렴 비서실장이 만류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화를 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국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 석 달 만인 11월 2일 오전 나는 김대중 납치 진사(陳謝) 사절로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머리가 복잡했다. ‘사과를 하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다 보니 벌써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내릴 준비를 하는데 스튜어디스가 의자 팔걸이에 붙은 재떨이를 치우며 “이거 네 번째 비우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비행기 안에서 줄곧 담배를 피웠던 모양이었다.(※그때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1996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결의를 전후로 기내 금연이 시작됐다.)



1973년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진사 사절로 일본을 방문, 다나카 가 쿠에이 일본 총리와 얘기하고 있다. [중앙포토]
 트랩을 내려오는데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1910~80) 외상이 국장 두 사람을 대동하고 마중을 나왔다. 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다 다리를 헛짚었다. 마침 오히라 외상이 나를 잡아주지 않았으면 계단 아래로 굴러 넘어질 뻔했다. 그만큼 심사가 복잡했다. 오히라 외상은 10여 년 전인 62년 한·일회담 막후협상 때 나와 소위 ‘김-오히라 메모’를 만들어내 한·일회담의 돌파구를 연,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62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에서 외상을 지낸 뒤 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내각에서 다시 외상에 취임했다. 오히라 외상은 나중에 나에게 “그때 보니 얼굴에 고민을 많이 하고 온 기색이 가득했다”고 말해줬다.



 오후에 일본 총리관저에 들어갔다. 다나카 총리가 응접실로 나오더니 나를 총리 집무실로 바로 데리고 들어갔다. 통상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기자들을 상대로 포즈를 취하고 들어가는데 나는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다나카 총리의 배려였다.



 나는 곧바로 “이번 일로 인해 일본 국민·정부에 대해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하고 몇 가지 조치를 설명했다. 다나카 총리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직접 와서 유감을 표명하고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확인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한 데 대해 높이 평가한다. 이걸로 됐다. 양국 간 공식적인 마무리는 됐다”고 간단히 말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김대중씨 같은 사람은 일본에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다나카는 화끈했다. 그때 오히라 외상이 끼어들었다 “어이 여봐, 그건 곤란해. 총리라고 해서 마음대로 얘기해도 돼? 국회에서 설명하고 답변해야 하는 건 나야”라고 항의했다. 정치 입문에서 오히라는 다나카의 선배였다. 다나카가 총리가 되기 전 두 사람이 늘 얘기하던 방식이었다. 다나카는 “총리가 됐다면 된 거지 뭘 떠들어”하고 오히라 외상을 꽉 눌러버렸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를 단 한 번의 총리회담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나카의 직선적이고 호방한 기질에 나와 개인적 인연이 더해진 덕분이다. 다나카 총리는 중학교 3학년도 채 못 다녔다. 일제 시절 대전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기도 했다. 전후 일본 정계는 도쿄 제국대학과 와세다 출신이 점령했다. 달리 말하자면 다나카는 ‘이마 다이코(いま たいこう;今太閤)’다. 즉, 저 밑바닥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올라와서 고관(高官, 즉 太閤)이 됐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볼 때 ‘별것도 아닌 자가 혁명을 했으니 일맥상통하는 게 있겠다’라고 생각해 날 좋아했던 것 같다. 다나카를 처음 만난 것은 1962년 이케다 총리와 한·일회담을 할 때였다. 그게 인연이 돼 종종 골프도 같이 쳤다. 골프도 꼭 못된 놈이 몽둥이 후려갈기듯 클럽을 휘둘렀다. 나하고 비슷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다나카 총리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이것으로 외교적인 문제는 매듭짓자. 우호 증진을 재확인하는 친서를 박 대통령에게 보내겠으니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고 말을 건넸다. 나는 저녁까지 같이 할 기분은 아니었다. “초대해줘서 고맙지만, 이 문제로 심려가 많은 우리 대사관 직원(이호 주일대사)들을 위로해줘야겠다”고 사양했다. 그렇게 김대중씨 납치사건은 간신히 수습됐다. 그해 말 박 대통령은 납치 사건과 외교적 파장의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해임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용금호(龍金號)=김대중 납치 사건에 동원됐던 중앙정보부 소속 대북 공작선. HID(육군 첩보대· 북파 공작 업무 수행) 출신들이 포함된 정보부 요원과 일반 선원 등 20여 명이 탑승했다. 길이 52m, 536t 선박으로 500마력짜리 엔진 2개가 장착돼 최고 시속 35노트(시속 약 65㎞)까지 낼 수 있는 쾌속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 물자 수송선으로 사용되다 한국 해군을 거쳐 중앙정보부에 인수됐다. 화물선으로 등록돼 한국~일본 노선을 오갔지만 북한의 공작침투 저지가 주목적이었다. 대북 침투요원을 태워 수송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는 납치 사건 후 배 이름을 ‘유성(唯星)호’로 바꿔 75년까지 사용했다. 이후 민간에 불하된 뒤 해체됐다.



◆『김대중 자서전』=김대중 전 대통령은 현해탄 배 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내들은 나의)두 손목에 30~40㎏ 무게의 돌인지 쇳덩인지를 달았다. 자기들끼리 두런거렸다. ‘이만하면 바다에 던지더라도 풀리지 않겠지?’… 비행기는 일본 국적기로 추정된다. ‘김대중 살해 계획’이 들통나자 다급해진 한국 정부도 일본 측에 공작선의 위치를 알려주고 해상 출동을 요청했을 것이다. …저들은 박정희의 지시로 나를 죽이려 했다.” 이 자서전은 김 전 대통령 서거 2년 뒤인 2011년 7월 출간됐다.





● 인물 소사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918~93)=일본 총리(1972~74). 니가타현(新潟縣)에서 태어나 15세에 학교를 중퇴한 뒤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우정상과 대장상 등을 거쳐 72년 7월 사토 내각을 이어 총리에 올랐다. 74년 11월 잡지 문예춘추가 자신의 정치자금 문제를 제기한 것이 일파만파로 번져 총리직을 사퇴했다. 76년에는 일본 고위관료들의 국제적 금품 수수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으로 기소돼 징역 4년, 추징금 5억 엔의 실형을 받았다. 재판에 따르면 다나카는 총리 시절 전일본항공(ANA)에 미국 록히드 항공기를 구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5억 엔을 뇌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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