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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정치 파행에 흔들리는 국민적 자존심

중앙일보 2015.07.13 00:02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딱한 그리스 사태를 지켜보면서 동정에 더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는 경제적 파탄뿐 아니라 민주화의 성패가 걸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스페인·포르투갈과 함께 그리스는 권위주의체제를 극복한, 이른바 민주화 제3의 물결의 선두주자였다. 그 흐름에 힘입어 87년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인들에게는 그리스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다.

 97~98년에 겪었던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국민적 자신감을 축적했다. 경제파탄의 심각성을 직감한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은 단순한 애국심의 차원을 넘어 어렵사리 성취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을 지켜내겠다는 각오의 징표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상징되는 국민적 자신감과 자존심, 그것이 작금의 정치파행으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과연 한국의 민주정치와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정상궤도에서 지켜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국민 마음속에 싹트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정치파행의 책임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모두 우리 국민의 손으로 자유롭게 직접 뽑지 않았는가.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지닌 원초적 취약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조속히 보완하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함께 감내하는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의 민주정치는 1948년 헌법 제정의 출발점부터 권력의 양분화, 그에 따른 상호견제와 균형을 제도적으로 처방했다. 입법부와 행정부, 즉 국회와 대통령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순기능적으로 운영해 권력 대결에서 오는 정치파탄을 막을 것인가 하는 어려운 숙제를 민주정치의 초년생이었던 한국 정치에 부과했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에서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으며 긴박한 대결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정치를 성공적으로 실험한다는 것은 애초에 너무나 과중한 과업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됐다가 4·19로 마감된 제1공화국이나 국가통치 능력의 극단적 부실을 노출하며 단명으로 끝난 제2공화국의 의회민주주의 실험은 그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5·16으로부터 시작된 권위주의 시대는 민주정치의 신장보다는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과 빈곤 탈피에 국가 운영의 우선 목표를 두겠다는 선택에 따라 행정부로 집중된 대통령의 권력이 입법부를 비롯한 시민의 정치참여를 압도하는 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룩한 87년 민주화는 다시 한번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국회와 대통령에게 국가 운영의 책임과 권력을 양분해 위탁하고, 40년 경험으로 축적된 시민과 정치권의 능력을 활용해 타협과 공생의 정치로 선진 민주국가를 운영해 나가겠다는 낙관론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앞으로 2년 반이면 여섯 대통령 30년의 민주정치 실험을 마감하게 되는데, 87년 체제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대체로 실망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작금의 정치파행이 그런 부정적 경향을 심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걱정스러운 경향은 대다수 국민의 정치문화적 성향이 내포한 이중성, 또는 자가당착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음도 국민은 스스로 인정해야 하겠다. 한편으로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이 선출한 대의기구인 국회에서의 복잡하고 장황한 논의 및 결정 과정을 지켜볼 인내력과 포용력을 포기한다면 결국 원천적 무책임의 책임은 국민 몫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민주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국민적 자신감과 자존심을 지켜가려면 우리 앞에 놓인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가야 한다. 우선 제도적 차원에선 헌법과 국민적 합의가 처방한 권력의 양분화가 순기능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하고, 상황적 필수 여건으로는 안보와 경제에 더하여 사회통합의 필수 여건인 양극화 해소 및 예방에 진력해야 하며, 정치문화적 차원에서는 타협의 명수(名手)들에게 정치무대의 중심을 맡기는 지혜와 인내력을 일상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으는 국민 집현전(集賢殿)을 작동하는 것이 획기적 정치개혁의 계기와 동력을 마련하는 첫 수가 돼야 하지 않을까.

 결국 민주공동체는 이웃에 대한 인간적 이해와 사랑, 특히 모두가 예외 없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 한계를 이해하고 관용을 체질화할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바로 그러한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인간 중심의 공동체라는 자존심을 재확인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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