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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은퇴후 요리하는 남편 어때요?"

중앙일보 2015.07.10 17:26
올 초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김성경(가명· 56)씨는 요즘 요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일주일 내내 요리교실이 열리는 월요일이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한 달 전만해도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라면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정도는 뚝딱 만들어 낼만큼 실력이 늘었다. 며칠전에는 아내 생일상을 직접 차렸다. 미역국에 닭볶음 탕을 만들었다. 요리교실에서 배운 것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 하게 만들었다. 박씨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내의 모습의 보며 요리를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씨처럼 앞치마를 두루는 남편이 늘고 있다. 젊은 신혼부부가 아니라 머리가 희끗 희끗한 50~60대 남편들이다. 몇년 전만해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 일을 못한다고 할 정도였지만 이젠 옛날 말이 됐다. 요즘은 요리를 잘해야 사랑받는 남편이 될 수 있다. 은퇴후 부부간의 평화 공존을 위해 요리는 특효약이다.



퇴직과 동시에 남편은 할 일이 사라진다. 출근해야 할 직장도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다. 맘만 먹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반면 아내는 남편이 퇴직해도 여전히 할 일이 쌓여 있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 여기에 남편이 은퇴한 가정은 일이 하나 더 생긴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편을 위해 매일 세끼는 물론이고 간식까지 챙겨줘야 한다. 일상적인 가사에 남편 스트레스까지 겹치는 것이다.



앞치마를 두르는 남자들



그래서 한 때 은퇴한 남자에 관한 유머에는 밥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은퇴 후 집에서 밥을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 먹으면 ‘일식씨’, 두 끼 먹으면 ‘두식군’,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라고 했다. 삼식이 시리즈에 이어 요즘 회자되는 우스갯소리는 ‘은퇴 남편엔 두 부류가 있다. 밥할 줄 아는 사람과 밥 못하는 사람’이다.



김성경씨는 밥 못하는 사람에서 밥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다. 그러나 그도 퇴직 직후엔 아내와의 사이가 미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평소 그렇게 살갑던 아내가 조금씩 말 수가 줄더니 어느 순간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그 증상은 갈수록 더 나빠졌다.



어느날 가만히 자신을 되돌아 보았다. 퇴직후 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들여다 보고 TV 앞에만 앉아 시간을 때우는 게 일과지만, 아내는 달랐다. 늘 청소며 빨래며 식사준비를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빈둥거리며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는 자신이 무척이나 얄미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김씨는 용기를 내 요리교실에 등록했다. 집에서 있는 날은 아내가 맘 편히 외출할 수 있도록 점심 정도는 스스로 챙겨 먹기도 한다. 그랬더니 아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수가 늘고 예전의 살가운 모습도 돌아왔다.



김씨가 요리의 세계로 이끈 것은 TV였다. 아닌게 아니라 올들어 TV에 요리 관련 프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쿡방(요리를 뜻하는 쿡과 방송의 합성어)’이 대박을 쳤고, 요리를 할줄 아는 남자텔런트는 귀하신 몸이 됐다. 요리 프로가 인기를 끌면서 금남의 영역이었던 부엌에 서있는 남자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내와 자녀를 위해 학원에서 요리 수업을 받는 아빠도 늘어나는 추세다. 유명 학원은 대기자가 줄을 설 정도다. 퇴직을 앞둔 남직원들을 위해 퇴직후 장보는 남편, 요리하는 아버지로서 가정에서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요리강좌를 개설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많다.



요리는 선택아닌 필수



원래 남자에겐 요리본능이 내재돼 있다고 한다. 수렵채집사회 때 고기와 같은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은 남성이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 요리를 통해 여성에게 제공한 전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요리하는 남자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주장도 있다. ‘요리를 잘하는 섹시한 남자’의 줄임말로 ‘요섹남’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요리하는 남자가 여성에게 편안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고 분석한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 남성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나는 추세와 무관치 않다.



은퇴후 밥타령만 하다간 밥상 대신 이혼청구서를 받기 십상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있다. 어쩌면 은퇴한 남자에게 요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맛깔나는 요리 솜씨로 평생 고생한 아내에게 밥상을 차려준다면 근사한 남편이 되지 않을까. 부부의 행복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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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서명수 더,오래 팀 필진

'더, 오래'에서 인생 2막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반퇴세대입니다. 데스킹과 에디팅을 하면서 지면을 통해 재무상담을 하는 '재산리모델링' 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행복하고 알찬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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