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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연애로 배웠네]<25>이지적 그녀와의 과학적 사랑

중앙일보 2015.07.10 05:01
그러니까 대학 다닐 때였다. 다른 과 여학생 A를 좋아한 적이 있었다. A는 지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친구들 얘기로는 공부에만 관심이 있고,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공부쟁이 그녀 A




친구 소개로 일단 안면을 튼 뒤 도서관에 있는 그녀의 자리로 찾아갔다. 내 손엔 과자와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A는 엷은 미소로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과자를 좋아하는구나! 그 재미에 나는 매일 조금 더 맛난 과자를 찾아 그녀에게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그녀도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편의점 열 곳 돌았어. 너를 위한 허니버터칩




나를 보는 그녀의 입에서 침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느 때처럼 그녀의 책상에 과자를 놓고 돌아섰다. 내 마음 속에선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대체 뭐지, 저 모습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를 바라보는 A의 입엔 침이 고여 있었다. 마음이 야릇했다. ‘그녀가 드디어 내게 애정을 느끼나보다.’ 하지만 왜 꼭 침을 흘려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잠시 생각을 잠겼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맞다! 그거다. 파블로프!”



파블로프? 친구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모르냐”고 물었다. 그제야 무슨 뜻인지 다가왔다. 파블로프는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분비한다’는 조건반사를 발견한 러시아의 생리학자. 친구의 말인즉,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A도 내 과자 공세가 계속되면서 내 손에 들린 먹을 것에 반응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좌절감이 몰려왔다. ‘내가 아니었구나. 과자였구나. 결국 그녀가 반응한 건….’



토익 듣기 평가 같이 들을래? (헐...)




그날 이후 나는 A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면서 결심했다. 다시는 선물을 앞세우지 않으리라. 나에 대한 마음과 내 손에 들린 것에 대한 마음을 구분하기 위해서.



몇 달 뒤 외로움에 떨며 지내던 나는 다른 대학에 다니던 B를 소개받았다. 평소 나를 긍휼히 여기던 친구 녀석이 소개팅을 주선한 것이다. ‘이번엔 잘 해봐, 임마’라는 지청구가 듣기 싫었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B의 전공은 화학이었다. 이지적인 인상에 차분한데다 그때로선 많지 않던 이과 여대생이란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서너 번 만남을 가졌을까. 말을 놓을 만큼 친해진 우리는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 연안부두로 놀러 갔다.



이번엔 잘 해보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참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때가 됐다. 바다 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작업 타이밍이라 생각한 나는 그윽한 눈길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 노을을 봐.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바다 쪽을 응시하면서도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지 않을까,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B는 멀리 하늘을 바라보다 말했다.



“노을? 일종의 ‘빛의 굴절’ 현상인데, 지구가 구형(球形·공 모양)이어서 해가 뜰 때와 질 때 햇빛이 비스듬히 비추게 되는 거야. 파장이 가장 긴 붉은빛만 대기를 통과해서 우리 눈에 도달하기 때문에 좀 더 붉게 보이는 거지.”



아, 그렇구나. 빛의 굴절 현상이었구나.



노을이 지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순간 내 가슴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면 노을을 앞에 두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B에게 뭘까….’



그녀도 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낀 걸까. 왠지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 후 B와 만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도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파블로프’ ‘노을’이란 단어를 들으면 A와 B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시 이것도 조건반사일까?)



과학 이론을 피부에 와 닿게 가르쳐주고, 잊어버리지 않게 해준 그녀들이 고맙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고맙다.



공부만이 살 길.




연애를 책이나 영화로 배울 수도 있지만, 거꾸로 ‘많은 것을 연애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과학 매니어 기자 science.love@joong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jmnet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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