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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핵 프로젝트’ 한국 내부 스파이들이 CIA에 고자질 … JP “미국은 한국을 자기들 손바닥 안에 가두려 했다”

중앙일보 2015.07.10 01:20 종합 12면 지면보기
1968년 5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부전선 남방한계선을 방문해 소총 조준경으로 북한 지역을 살펴보고 있다. 당시 한국군의 개인 화기는 6·25전쟁 때 사용하던 M-1소총이었다. M-1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 보병의 표준 총기로 57년 단종됐다. 소총 한 자루 만들지 못했던 한국은 71년 일부 총포와 대전차 지뢰를 최초로 국산화했고 70년대 율곡사업으로 무기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미국은 한국에 은혜를 끼친 나라다. 요즘 세대 중에 미국을 고맙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미국의 은혜는 남아 있다. 은인은 잊어도 은혜는 남는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미국에 다른 면도 있다. 근원을 따져 보면 미국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도 있다. 한국의 장래를 내다보지 않고 우리의 절실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이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5> 핵개발은 좌절됐는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좌절시킨 것은 미국 책임이다. 우리가 핵무기를 갖게 되면 북한을 치고 들어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중단됐지만 북한은 아무 제한도 받지 않고 2010년대에 상당한 수준의 핵무기를 과시하고 있다. 미국은 정작 막았어야 할 북한 핵무기는 못 막고 엉뚱하게 우리의 손발만 묶은 셈이다.



 미국이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의 핵무기를 막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을 손바닥 안에 놓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어 자기들 손바닥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이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겠다고 하면 갖은 수단과 협박을 동원해 막았다. 약하면 불쌍한 것이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승복하다가도 한 구석에서 ‘우리가 이렇게 무너질 수 없지 않으냐’라는 마음에 다시 저항하고 싸우면서 새로 일어난다. 미국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활용했다. 종미(從美)가 아니라 용미(用美)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에 핵의지를 심은 건 미군의 일방적 철수였다. 70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철군 예정통보(71년 3월 2만2000명 철수→75년까지 완전 철수)가 있은 뒤 대통령은 내게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말엔 강렬한 집념과 냉정한 현실인식이 함께 담겼다. 절대무기를 가져야겠다는 우리의 집념을 미국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니 다양한 기술들을 차근차근 축적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핵기술들은 무기용만이 아니라 산업용으로도 활용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는 실용적 접근법이었다. 예를 들어 평상시 화약공장을 돈을 버는 산업용으로 가동하다 유사시 폭탄을 만드는 무기용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핵무기는 북한에서 이념으로 개발된 데 반해 핵기술은 한국에서 중화학공업의 한 산업으로 다뤄졌다. 핵무기든 핵기술이든 실질적인 핵개발은 우리 경제가 방위산업·중화학공업 시대로 전환한 73년을 기점으로 진행됐다. 치고 달려나가는가 하면 멈추면서 다른 양보를 받아내는 미국과의 핵 숨바꼭질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73년 6월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과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재무장관 등을 만났다. 지스카르데스탱은 이듬해 대통령에 오른다. 프랑스는 74, 75년 내가 매년 연속 찾아갈 정도로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핵무기 집념을 프랑스 현지에서 보좌했다. 그들을 만날 때 나는 ‘핵재처리 기술’과 ‘미사일 도입’ ‘항공기 구매’ 같은 중화학공업 세일즈 외교에 집중했다. 퐁피두는 당시 암에 걸렸는데 나와 배짱이 맞았다. 지스카르데스탱은 나와 동갑인 데다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면서 의기가 투합했다. 재처리 과정은 핵개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난도 기술에 해당한다. 원자력 발전이나 핵무기 제조에 결정적인 요소다.



1972년 5월 김종필 국무총리(JP·왼쪽에서 셋째)가 서울 공릉동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해 실험용 원자로 인 트리가 마크(TRIGA Mark) 3호를 보고 있다. JP 왼쪽은 최형섭 과기처 장관, 오른쪽은 윤용구 소장.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72년 5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프랑스에 몰래 보내 원자력기술 협력과 재처리 시설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내가 프랑스 대통령과 재무장관에게 중화학공업의 협조를 부탁할 때도 이 기술은 빼놓지 않았다. 75년 4월 한국의 원자력연구소와 프랑스의 재처리 국영회사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 및 기술용역 공급 계약’이 맺어졌다. 이 계약이 실행됐다면 재처리를 통해 핵폭탄 연료인 플루토늄을 연간 20㎏ 추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핵폭탄 하나엔 5~10㎏의 플루토늄이 들어가므로 연 2~4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때마침 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 성공을 계기로 미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나라들을 조사했다. 한국은 금세 표적이 됐다.



 미국의 국무부와 국방부, CIA에선 한국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제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 기관들의 한국 파견 요원이 유능했다기보다 우리 내부에 고자질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스파이가 곳곳에 수두룩했다. 핵개발을 위해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외국의 한국인 두뇌들을 극비리에 초빙하면 순식간에 미국 사람들에게 다 알려졌다. 무슨 일을 비밀리에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은 캐나다를 방문해 캔두(CANDU)형 원자로를 도입하는 협상을 벌였다. 미국은 캔두형 원자로가 플루토늄 추출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중수로(重水爐)식이라는 이유를 들어 핵폭탄 제조용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선 북한의 서울 공격 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평양까지 날아갈 수 있는 유도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다. 미국은 다짜고짜 핵폭탄 운반용 발사체라고 단정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엔진 기술 공급을 중지하려 했다. 한국은 결국 사거리를 180㎞로 줄여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인식은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에선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선 중수로 원자로, 미국에선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기술을 각각 도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자력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대전기계창 같은 현장뿐 아니라 청와대·총리실·국방부·과학기술처·재무부 같은 기관의 각급 부서장들에겐 주한 미국 대사관과 CIA 요원들이 착 달라붙어 위압적으로 감시하고 명시적으로 핵개발을 중지하라고 압박했다.



 결국 70년대 초반부터 4~5년 지속된 박 대통령의 핵무기 집념은 76년 1월 프랑스와 맺은 재처리기술 계약이 파기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정 끝까지 가겠다면 결정적인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최후통첩에 박 대통령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손을 들었다.



 핵무기 개발이 좌절됐다고 해서 그동안 축적된 핵기술까지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재처리기술 도입은 실패했지만 중수로 원자로는 국내에 들어와 월성1호기에 적용됐다. 미사일 기술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핵·미사일·항공기 기술에서 미국에 도전적인 프랑스를 활용함으로써 한국은 대미 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얻을 수 있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서해5도 해상에서 우리 해군은 북한의 함포(艦砲) 능력에 판판이 당했다. 북한에 끌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가장 큰 이유가 북한 고속정에 장착된 스틱스 같은 함대함 미사일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스틱스보다 성능이 뛰어난 하푼 미사일을 우리한테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스카르데스탱에게 요청해 프랑스의 함대함 미사일인 엑조세 한 세트(4대)를 시험 구입했다. 우리가 코리아타코마에서 제작한 고속정에 엑조세 미사일을 장착해 발사 실험을 하니 그제야 미국은 하푼 미사일을 팔겠다고 나왔다. 하푼을 도입하자 서해엔 금세 평화가 찾아왔다.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이길 수 없을 때 또 다른 강한 힘을 끌어들여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적 지혜를 익혔다.



 76년 미국 대선의 승자인 카터 대통령은 또 다시 미군 철수 계획을 밝혔다. 그때 나는 총리를 그만두고 평의원으로 있었다. 핵무기는 없었지만 핵기술, 원자로발전기술을 포함한 중화학공업이 융성하던 때였다. 박 대통령은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는 언제라도 핵무기를 만들 것이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70년 닉슨이 처음 철군 방침을 통보해왔을 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카터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두 번째 철군 위협은 덜 위협적이었다. 우리가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으로 실력을 키운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 인물 소사전 최형섭(1920~2004)=한국의 1세대 과학자이며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개척자다.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화학야금학으로 박사를 받아 1959년에 귀국했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원자력연구소장(1962~66)과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KIST·66~71) 등을 거쳐 71년 2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올랐다. KIST 원장 시절 미국·독일·영국 등지의 한국인 과학자 18명을 데려와 한국 과학기술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대덕연구단지 설립과 다수 출연연구소 설립에 기여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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