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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 미국인 역대 최다 … 그들이 내년 대선 판 흔든다

중앙일보 2015.07.10 00:36 종합 21면 지면보기


맥락이 비슷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면 하나의 흐름이 된다. 지금 미국이 그렇다.

[똑똑한 금요일] 미국의 ‘좌클릭’



 지난 1일 위스콘신주의 매디슨.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주)의 유세에 1만여 명이 모였다. 2016년 대선 관련 집회 규모로는 최대다. 유력한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최다 동원 청중 기록이 5500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샌더스 돌풍’이라고 할 만하다. 대중은 자칭 사회주의자 샌더스에게 열광한다. 그는 대형은행 해체와 조세제도 개혁 등을 통한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다.



 앞서 한 주 전에는 두 건의 연방 대법원 판결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대법원은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 가입자에 대한 연방정부 보조금 지급을 합헌으로 판결했고, 동성결혼도 합법화했다. 600만 명 이상의 저소득층이 건강보험을 유지할 수 있게 됐고, 300만 명의 동성결혼 부부가 1000여 개 이상의 혜택을 보장받게 됐다.



지난달 25일 오바마케어 합헌 결정에 환호하는 대학생들. [AP=뉴시스]


 그런가 하면 미국 전역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가속화되고 있고, 유해식품 규제가 줄을 잇고 있다. 노예제 철폐에 반대한 남부의 상징이었던 남부연합기는 속속 퇴출되고 있다.



 일련의 사건에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라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가 관통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 보장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미국 사회가 진보주의 쪽으로 이동하는 ‘좌클릭’ 현상이 뚜렷해진 것이다.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 의장·공화당)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민주당 소속인 버락 오바마가 현직 대통령이란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사회 분위기가 진보로 기울고 있는 것은 보수주의에 실망하는 대중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2015년 현재 31%다. 갤럽의 1999년 조사 시작 이래 최고치다. 16년 전 조사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비율이 각각 39%와 21%였던 것과 비교하면 보수의 퇴조와 진보의 득세가 한눈에 보인다.



지난달 26일 동성결혼 합헌 결정 이후 결혼증명서를 받은 동성커플. [AP=뉴시스]


 일례로 지난 5월 조사에서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미국인 비율은 60%로 90년대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반면 96년만 해도 68%에 달했던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는 37%로 뚝 떨어졌다. 그 사이 드라마엔 동성커플이 등장했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유명 인사들의 커밍아웃이 늘어났다. 연방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 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대법원이 대중의 이런 변화를 수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경제 상황도 미국의 좌클릭에 일조했다. 금융위기 이후 7년, 실업률은 5.3%로 떨어졌고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우고 있지만 대중은 경제 회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초 뉴욕타임스와 CBS 뉴스 공동조사에 따르면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미국인은 66%로, 공평하다고 여기는 미국인의 2.4배에 달했다. 빈부 격차가 예전보다 더 벌어졌다고 느끼는 이는 67%였지만 그 간격이 좁혀졌다고 보는 응답자는 전무했다.



이런 여론은 최저임금 인상 촉구로 이어졌다. 오바마 정부의 법정 최저임금 인상안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지방자치단체가 행동에 나섰다. 대표적 사건이 5월 로스앤젤레스(LA)에서 일어났다. LA시 의회는 시간당 최저임금을 9달러(약 1만원)에서 15달러(약 1만7000원)로 올렸다. 이 조치는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과 연방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을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임금의 하한선을 뜻하는 최저임금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그 마지노선의 상향은 사회적 기류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대기업이 성장하고 부자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그 효과가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으로 전파된다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갔다. 임금 인상이 제품 가격 상승→소비 감소로 이어진다는 보수 진영의 논리보다 임금이 올라야 구매력이 생겨 소비가 늘어난다는 진보 진영의 설명이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건강과 보건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조치가 속출하고 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지난달 인공 트랜스 지방 퇴출조치를 발표했다. 심장질환의 주범인 동시에 저렴하고 식감이 좋다는 양면성을 가진 트랜스 지방이 마침내 금지되는 것이다. 뉴욕시는 스티로폼 용기 규제를 시행 중이다. 이달부터 모든 레스토랑과 패스트푸드점, 테이크아웃 전문점 등에서 일회용 스티로폼 용기와 컵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강도 높은 청량음료 규제를 추진 중이다. 청량음료 광고에 담배 광고에 넣는 것과 같은 수준의 유해성 경고를 포함하라는 것이다. 이런 규제들은 기업과 자영업주의 부담을 늘릴 뿐 아니라 기업 활동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며 보수 진영이 완강하게 반대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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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수도로 여겨지는 뉴욕에선 임대료 동결조치까지 나왔다. 뉴욕시 산하 위원회가 임대기간 1년인 아파트 임대료를 동결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뉴욕 아파트 220만 가구 중 100만 가구가 대상이다. 각종 물가 급등으로 서민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판단이 집주인들의 반발을 압도했다.



  미국에서 과거 공화·민주 후보들은 반대표 흡수를 위해 상대당의 정책을 전략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낙태 금지 입법을 추진하지 않겠다”며 민주당 지지층을 끌어들이려 했다. 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진보 노선보다 ‘재정 적자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당선됐다. 68년 대선에서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민주당 단골 메뉴인 복지정책을 선점해 불리한 선거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내년도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보면 진보적 정책 표명이 두드러진다. 힐러리 전 장관이 좋은 예다. 월스트리트와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에게서 “상위 25명의 헤지펀드매니저가 미국 모든 유치원 교사들 급여를 합친 것보다 많이 번다. 그런데도 더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다”는 언급이 나왔다. 미국 언론들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란 표현을 쓸 정도다.



 공화당 후보들 사이에서도 정책 노선을 재정립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후보들이 남부기 퇴출을 지지하고 나선 게 한 사례다. 남부기는 공화당의 텃밭인 남부 백인 보수 유권자의 향수가 깃들어 있는 깃발이지만 최근 혐오스러운 인종주의의 상징으로 지목받고 있다. 갤럽은 이에 대해 “2016년 대선은 사회적으로는 보다 진보적이고, 경제적으로는 덜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잡으려는 경쟁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리버럴(liberal) 아메리카’는 인구 변화와 맞물려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80~96년에 태어난 밀레니얼세대 가운데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응답자는 30%로 보수적이라고 답한 이들(28%)보다 많았다. 부모세대인 베이비부머(46~64년생)에서 보수라고 응답한 비율(44%)이 진보(21%)보다 배 이상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보여 준다. 베이비부머 인구는 줄어들고 밀레니얼세대가 사회의 주력으로 부상할 것을 감안하면 미국 사회의 진보주의 성향은 당분간 더욱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종 구성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 온 백인·앵글로색슨족·프로테스탄트(WASP) 비중은 줄고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가 늘고 있다. 이런 변화 역시 미국 사회에 ‘다름’과 ‘다양성’ 수용을 촉구하는 변수가 되고 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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