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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규제로 팔 수 없던 ‘기술융합 안전모’

중앙일보 2015.07.10 00:02 경제 8면 지면보기
김상규
조달청장
토끼 한 마리가 그루터기에 걸려 자빠져 죽는 모습을 보고, 농부가 그 자리에서 토끼가 걸려 넘어지기를 계속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비자’에 나오는 수주대토(守株待兎)란 말인데, 융통성없고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영역간의 파괴를 가져와서, 예전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술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혈관을 타고 암세포를 찾아가 항암제를 전달하는 의료용 ‘나노 로봇’이 개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노 로봇은 바로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등 첨단 분야가 어우러진 대표적인 기술융합제품이다.



세계적인 IT 기업인 구글(Google)도 자신의 전문 분야인 정보기술을 토대로 무인자동차와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난 한해 국내에서 기술 융합과 관련해 등록된 특허만 해도 무려 3500여 건에 달한다. 이제 다른 분야의 기술을 적용하여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융합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행정은 현장의 기술발전에 뒤처지는 것 같다. 한 무선통신 장비기업가가 2년여의 연구 끝에 통신장비, 센서 등을 내장한 ‘융합 안전모’를 개발했다. 무전기를 따로 휴대할 필요가 없어 작업 능률을 향상시킬 신제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 제품은 기존의 안전기준에 미달해서 판매가 불가능했다. 안전모는 무게 440g미만이고 구멍이 없어야 하는데, 이 융합 안전모는 통신장비 등이 부착되어 무게가 초과했고 센서 부착을 위한 구멍이 있었던 것이다. 안전에 이상이 없다는 별도의 인증이 새롭게 만들어진 이후에야 판매할 수 있었다.



 제도가 기술개발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공공조달시장은 융합 신기술제품의 판로를 열어줄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되어야 한다. 조달청은 이러한 제품이 손쉽게 조달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우수조달물품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우선, 융합신기술 제품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물품 분류체계에 맞지 않아 물품목록번호를 얻는데 장시간 소요된다. 그래서 이러한 제품의 경우 물품목록번호 없이도 우수조달물품 신청이 가능하도록 진입장벽을 없앴다. 융합 신기술 제품이 우수조달물품으로 최종 지정된 이후에 물품목록번호를 받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증기준이나 시험기준이 없는 신제품에 대해서는 공인기관의 시험성적서를 활용하여 품질을 검증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공인기관의 시험성적서도 받지 못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자체 시험결과도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품질소명자료로 인정하도록 했다. 품질 관련 인증이 없으면 우수조달물품 신청조차 못하던 기존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이다.



행정은 안정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혁신적인 제품을 수용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과거의 잣대와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갈 때 비로소 창조경제의 기반도 마련될 수 있다.



김상규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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