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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망명과 망령 사이

중앙일보 2015.07.08 00:01 종합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유령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뒷골목에서 스멀대는가 싶더니 버젓이 큰길로 나섰다. 이달 들어 메르스가 주춤하는 틈을 잽싸게 파고들었다. 신문과 방송에 등장해 목소리를 높인다. 여름 강물의 녹조처럼 확산 일로다.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 ‘탈북망명’이란 유령이다.



 모양새를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다. 북한 노동당 고위급 간부로 운을 떼더니 체급을 확 올린다. 김정은 비자금을 관리하는 당 39호실 핵심이란 얘기에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제2경제위 책임자급이란 주장까지 더해졌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왔던 ‘박승원’이란 스리 스타 장성(북한군 상장)까지 실명으로 캐스팅됐다. 해외에 외화벌이를 위해 나와 있던 200여 명은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북한 이슈를 20년 넘게 취재해온 필자가 봐도 이 정도면 탈북망명설의 최절정이자 시쳇말로 ‘역대급’이다.



 이대로라면 평양판 엑소더스가 임박한 분위기다. 김정은 체제가 집권 4년 만에 큰 균열이 간 것이란 관측이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어리둥절해진다. 최소한의 구성요건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일 정권 때 군부 최측근 중 하나인 박재경 대장의 망명설도 마찬가지다. 사실이라면 ‘북한군 장성 망명공작’을 숙원사업으로 여겨온 우리 군 정보당국엔 쾌거다. 하지만 실체가 없다. 언제, 어디서 탈북을 했고 어디로 향했는지도 오리무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한 방송채널에선 “도대체 이 탈북인사 어디 있는 건가요”란 앵커 물음에 “대한민국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는 기자의 답이 이어진다. 눈치 없는 앵커의 송곳질문이 이어지자 군색한 답변이 허공을 가른다. ‘대북소식통’을 앞세운 여타 언론의 전언은 신뢰도에 연신 결정타를 날린다.



 이쯤에서 황장엽 망명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1997년 2월 베이징 주재 우리 공관에 그가 진입하자 정부는 언론사 편집·보도 책임자를 불렀다. 소상한 경위설명과 보도협조 당부가 이어졌다. 황 비서는 외교줄다리기 끝에 67일 만에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씨도 82년 9월 스위스 한국공관 망명 때 6개국을 거치는 숨바꼭질을 벌였다. 고위급 탈북이란 게 항담가설(巷談街說) 수준의 ‘카더라 통신’으로 다뤄질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이번 경우는 어떤지 궁금해졌다. 핵심 당국자는 “김관진 안보실장도 ‘망명설이 자꾸 나오는데 어찌 된 거냐’며 보좌진에게 물었다더라”고 귀띔했다. 망연자실이다. 대통령에게 대북 상황을 직보하는 당국자도 모르는 고위 탈북망명은 상상하기 어렵다. 통일부 간부는 “홍용표 장관이 대북 가뭄 지원을 카드로 돌파구를 만들려 하는데, 엉뚱한 추측성 보도로 헝클어지고 있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정부 내 대북 메시지 관리나 남북관계에도 불똥이 튄다는 얘기다.



 사태가 심각한데도 관계 당국은 “대북 정보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손사래 치고 있다. 정보위를 소집해 사실을 규명해야 할 국회는 정쟁에 허우적거린다. 미 국무부가 “한국 정부에 물어보라”며 공을 넘겼지만 대북 부처는 침묵한다. 과거 탈북망명 오보로 곤경을 치르곤 했던 때의 데자뷰(dejavu)다.



 2003년 5월 길재경 망명 오보는 한국 언론과 정보맨들에겐 악몽이다. 김정일의 금고지기인 길재경 당 부부장의 미국 망명을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보도했고 신문·방송은 대대적으로 전했다. 하지만 중앙일보 방북취재단이 이미 2000년 6월 숨진 길재경의 애국열사릉 묘비를 촬영했던 게 드러나며 반전됐다. ‘특종’은 하루아침에 대형 오보가 됐다. 지난 5월에는 미 CNN이 서울의 고위 탈북인사를 인터뷰했다며 ‘김경희 독살설’을 보도했다 망신을 샀다.



 북한·통일 문제에 천착하며 터득한 노하우 중 하나는 ‘사람 기사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고, 최고 실세라고 치켜세운 인물이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게 북한 권력이다. 그만큼 호둣속같이 복잡하다.



 이제부터라도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무엇보다 언론 스스로 북한·통일 현안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전문 역량을 키워야 한다.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분 못하는 선구안으론 안타를 칠 수 없듯이 떴다방 식의 보도로 통일에 다가가기는 어렵다. 북한 전문가 그룹도 난무하는 설에 휘둘리기보다 진중한 분석과 판단을 제시해야 한다. 종편 출연 등으로 여론시장을 분점한 탈북자 사회도 성찰이 필요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 문제가 희화되고 탈북자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 당국도 대북정보 독점의 폐해를 짚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김정은의 공포정치 속에서 평양의 파워엘리트들이 얼어붙은 건 분명해 보인다. 위기를 느낀 일부는 망명을 꿈꿀 수 있다. 제2의 황장엽이 없으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런 개연성이 섣부른 기대감으로 치닫는 건 곤란하다. 망령처럼 떠도는 근거 없는 탈북망명설에 발목 잡히기에는 우리의 통일채비 발걸음이 바쁘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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