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진부한 스토리 세련된 무대로 살린 체스 vs 뛰어난 스토리 평범한 무대로 가린 데스노트

중앙선데이 2015.07.04 17:48 434호 25면 지면보기
7월, 뮤지컬 전쟁이 뜨겁다. 한여름 휴가를 떠난 공연계의 빈자리를 뮤지컬이 채워주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대극장 뮤지컬이 동시다발로 개막하니 팬들은 숨이 차다. 지난해 위기설이 나돌던 업계가 맞나 싶게 모든 주요 제작사가 빠짐없이 각자의 대표작을 무기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7월의 뮤지컬 전쟁: 체스 vs 데스노트

4월 말부터 줄곧 예매율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신작 ‘팬텀’의 제작사 EMK는 6월 믿고 보는 레퍼토리 ‘엘리자벳’까지 출동시켰다. 신시컴퍼니는 ‘유린타운’과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공연에 이어 7월 중순엔 광복 70주년 창작뮤지컬 ‘아리랑’까지 줄줄이 쏟아낸다. 설앤컴퍼니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명작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돌아왔고, 오디뮤지컬컴퍼니는 최고의 스타 조승우를 앞세운 전통의 레퍼토리 ‘맨 오브 라만차’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중 지금 가장 핫한 무대는 6월 19일 나란히 국내 초연으로 막을 올린 신생 제작사 씨제스컬처의 ‘데스노트(8월 15일까지 성남아트센터)’와 유럽 뮤지컬의 창의적 재해석으로 정평이 난 엠뮤지컬아트의 ‘체스(7월 19일까지 세종문화회관)’다. 정의를 빙자해 살인을 즐기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두뇌게임과 왜곡된 정치 싸움으로 변질된 챔피언들의 체스게임. 두 작품 모두 두 남자의 ‘게임’을 무대화한 것이라 흥미롭다. ‘데스노트’와 ‘체스’, 두 최신작의 게임 결과는 어떨까. 부동의 티켓파워 김준수를 앞세워 전회전석매진 신화를 쓰고 있는 ‘데스노트’가 어차피 승자가 되겠지만, 게임의 내용은 복기해 볼 만하다.

오페라·록 넘나드는 음악 강렬한 ‘체스’
‘체스’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라이선스 뮤지컬을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게 적절히 튜닝하고 아이돌 스타를 대거 투입하는 전략으로 한국은 물론 한류시장까지 개척한 왕용범 연출·이성준 작곡 콤비가 또다시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이번에도 기존 전략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1986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오래된 작품을 ‘아시아 최초’로 들여왔고, 2AM의 조권을 비롯해 샤이니의 키·빅스의 켄·B1A4의 신우 등 ‘아이돌 쿼드러플’ 캐스팅으로 포진했다. 신성우·이건명 등 중견 뮤지컬 스타들도 무게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

미국과 구소련의 이념 대결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방콕과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체스 세계 챔피언쉽에서 미국 챔피언 프레디와 소련 챔피언 아나톨리가 만나게 되고, 체제의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하지만 실제 체스 게임의 결과는 문제가 아니다. ‘체스’는 체제에 휘둘려 체스판의 말처럼 살아가는 개인의 인생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냉전시대에 얽힌 사랑과 배신’의 스토리는 대체로 뻔하다. 프레디와 미묘한 관계에 있던 조수 플로렌스를 사랑하게 된 아나톨리가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런데 플로렌스의 정치범 아버지를 미끼삼은 소련의 정치 모략에 말려들어 아나톨리는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조국으로 돌아간다. 썩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니다. 두 사람이 갑자기 왜 사랑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나치게 빠른 포기도 당황스럽다. 프레디의 캐릭터도 붕뜬 느낌이다. 하지만 왕용범·이성준 콤비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단점을 가리고 멋진 무대로 포장했다.

먼저 눈에 띠는 건 조권의 재발견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 ‘프리실라’의 드랙퀸 아담 등 전작에서 방송에서보다 한층 더한 가벼움으로 어필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는 반전 캐스팅이다. 대본상의 나이 40대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지만, 이념 갈등을 한몸에 짊어진 무게에 짓눌린 아나톨리의 아픔을 절절이 표현하며 변신에 성공했다. 물론 그를 돋보이게 한 건 음악과 안무, 무대미술 등 모든 구성요소가 완성도를 갖춘 연출의 승리다.

사람이 직접 말이 되는 ‘휴먼 체스’의 마을 이탈리아 마로스티카의 성곽을 상징적 무대장치로 삼아 부다페스트와 방콕의 이국적인 풍경, 소련과 미국의 국기를 이용한 영상을 미디어파사드로 투사한 무대는 화려하면서도 세련됐다. 무대 전체를 체스판 삼아 앙상블 배우들을 흑백의 체스말로 활용한 절제된 안무도 인상적이었다. 프레디와 아나톨리의 최후의 대결을 한바탕 체스말들의 군무로 펼쳐낸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아바(ABBA)의 비요른 울바에우스가 작곡한 오페라와 락을 넘나드는 강렬한 음악도 기대 이상이었다. 1막 엔딩에 아나톨리가 홀로 부르는 행진곡풍 넘버 ‘anthem’은 감동적이었고, 2막에 저마다의 사연을 드러내는 대부분의 넘버들도 무대에 묵직한 비장미를 더했다. 세련된 무대미학이 배우도 살리고 작품도 살린 셈이다. 진부한 스토리를 무대 매커니즘으로 화려하게 살려내 스스로 지속가능한 무대가 됐다.

김준수의 외로운 싸움 ‘데스노트’
‘데스노트’는 사실 비평이 무력해지는 무대다. 최고의 티켓파워 김준수 원캐스팅으로 ‘데스노트=김준수’라는 등식이 성립하니, 티켓오픈과 동시에 전쟁을 치른 팬덤을 제외한 일반 관객은 어차피 이 작품을 구경도 못한다. 뮤지컬이라는 대중문화시장에 버젓이 나와 있지만 ‘김준수 뮤지컬’은 일부 열성팬들만이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오타쿠 콘텐트가 되버린 것이다.

티켓시장뿐 아니라 무대에서도 ‘데스노트’는 곧 김준수였다. 홍광호·정선아·강홍석·박혜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제몫을 다하긴 했다. 심지어 김준수는 스토리 흐름상 막이 오른지 40분만에 등장한다. 하지만 김준수가 아니라면 굳이 이 작품을 볼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데스노트’는 잘 알려진 대로 일본 라이선스 뮤지컬이다. 전세계 35개국에서 발간된 동명의 인기만화가 원작이다. 죽음의 신이 장난삼아 떨어뜨린 데스노트를 발견한 천재 대학생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무기로 범죄자들을 처단해 혼란을 일으키고, 또 다른 천재 명탐정 엘이 나타나 라이토와 심리전 및 두뇌전을 벌인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빠른 전개와 거듭된 반전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원작은 영화로도 큰 성공을 거두며 3탄까지 제작된 검증된 킬러 콘텐트다. 오로지 원작을 살리는 무대 매커니즘이 관건인 셈이다. 하지만 신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일본의 연출 거장 구리야마 타미야와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힘을 모은 ‘데스노트’의 뮤지컬화는 실망스러웠다.

스토리는 영화 1, 2탄의 흐름을 대체로 따라가지만, 스토리가 적절히 압축된 게 아니라 거칠게 간추려져 긴장감이 실종됐다. 고도의 잔머리로 수사망을 피해가는 라이토와 이를 간파하고 선수를 치는 엘의 엎치락뒤치락 두뇌싸움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70억 대작이라기엔 무대도 몹시 단출했다. 오케스트라 피트를 감싸는 변형된 은교 정도가 독특했고 회전무대가 돌긴 했지만 이런 장치가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전환에 기여하진 않았다. 두 사람의 심리전을 한 판의 테니스 시합으로 압축한 정도가 연출력이 돋보인 유일한 장면이다.

시종일관 맨발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탕을 빨며 돌아다니는 김준수는 몰입연기의 진수를 보여줬지만, 폭발적인 가창력은 되레 오버스러웠다. 엘은 상대와 조용한 심리전을 벌이며 안으로 침잠하는 괴짜 캐릭터다. 속을 알 수 없는 게 진짜 매력인데 목에 핏대를 세우며 표출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드라마틱한 음악도 원작의 독특한 분위기와는 어딘지 맞지 않았다. 긴장감 없이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지루한 무대에 김준수가 목청이 터질 듯 날카로운 고음으로 고군분투했지만, 그럴수록 원작과는 멀어져갔다. 유니크한 원작에 평범한 무대언어를 적당히 적용한 탓이다.

결국 ‘데스노트’는 김준수도, 홍광호도 아까운 무대였다. 그들의 실력과 존재감이 작품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일본시장까지 노린 선택이었겠지만, 상품성을 좇아 재능을 부질없게 소모하는 듯해 안타까웠다. ‘김준수의 데스노트’는 게임에 이겼지만, 원작의 매력을 담지 못한 뮤지컬 ‘데스노트’에 자생력이 있을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엠뮤지컬아트·씨제스컬처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