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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내 상황 이해해달라”는 서양인에겐 '약속 불이행'

중앙일보 2015.07.04 17:42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지금 내 상황이 이러니 이해해 달라”“지금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등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대화에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유독 많은 것 같다. 심지어 TV 뉴스에서도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이지만 서양인들은 이를 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서양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말을 들을 경우 상대방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받아들인다.


자기 중심적 사고는 사회발전의 걸림돌
한국선 “내 상황 이해해달라”요구 많아
서양인은 이를 약속 불이행으로 간주
건전 사회 위해선 배려 문화 확산도 필요

한국인들은 왜 상황에 대해 집착하고 이를 자주 거론할까. 미국의 저명한 리처드 니스벳 미시간대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서양인과 동양인(한국인 포함)들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의 차이 중 하나가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서양인들은 인간이 가진 특성이 어느 상황에서나 유지되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뀔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양인들의 경우 외부 상황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에 적응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한국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면 인간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서양인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듯 흔들림 없이 악(惡)과 맞서 싸워 결국 승리를 쟁취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서양인인 내 관점에선 좀 더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상황보다 인간을 강조하는 서구의 철학과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구체적으로 확립됐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의해 지배되며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도 이런 사고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한국인들의 상황에 대한 집착을 돌이켜보면 그 역사적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여 침략을 많이 받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대해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 변화의 흐름을 잘 타는 사람에게 '뛰어난 유연성을 갖고 있다'며 후한 점수를 주곤한다. 반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고집불통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와 관련, 옛 은사였던 독일 출신의 한 교수는 한국인들의 운전 스타일을 예로 든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 필요하지 않으면 차선을 바꾸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들은 옆 차선에 틈이 생기면 차선을 바꿔 그 공간을 차지한다. 한국인들은 도로 상황에 따라 즉각 대처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서양인들은 이런 한국인들의 운전 습관을 처음 접할 때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도 이런 성향에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급변하는 상황에 재빨리 대처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달리 보면 상황을 지배하고 활용하겠다는 서양인들의 사고와 일맥상통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황 논리만을 앞세울 경우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건·사고들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상황에 맞는 신속한 적응도 중요하지만 주변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길 희망해 본다.



이리나 코르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HK연구교수로 부임했다.



이리나 코르군 한국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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