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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봉준호 영화에 꽂혀 한국행 … 서울은 1920년대 파리”

중앙일보 2015.07.04 00:27 종합 12면 지면보기
2009년부터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프랑스인 오를리앙 레네(33·위)와 미국인 케빈 램버트(38)가 2일 중앙일보를 찾았다. 영화를 찍는 카메라를 직접 가져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곳은 독특하다. 교육받은 젊은 외국인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서로 자극을 주고 창의성을 키운다. 경쟁이 심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와도 다르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 외국인 예술가들이 모이던) 1920년대 프랑스 파리와 비슷하다.”(미국인 케빈 램버트·38)


[사람 속으로] 몰려오는 이방인 예술가들

 “이방인 커뮤니티가 멋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선하고 야망을 갖고 있다. 여기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앞서 살던) 프랑스 파리보다 낫다.”(프랑스인 가브리엘 갈랑·23)



 이들이 말하는 ‘이곳’이란 대한민국 서울이다. 램버트는 올해에만 주요 세계 인디 영화제 4곳의 초청을 받은 감독이고, 갈랑은 파리 국제영화학교(EICAR) 출신 감독이자 프로덕션 디자이너(세트·촬영 장소 등의 책임자)다. 그런 이들이 ‘예술의 중심지’로 불리는 파리와 서울을 비교한다. 어찌 된 일일까.



 외국인 예술가들과 교류해 온 김현숙 케이무비러브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예술가가 의외로 많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각급 학교가 원어민 강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다. 낮에는 영어 강사로 일하고, 밤에는 예술을 한다. 이들은 서로 만나 배우고, 토론하고, 장비를 나눠 쓰며 작품을 만든다. 요즘엔 영어 강사 외에 시나리오 작가, 홍보 전문가, 블로거로 일하는 이들도 늘었다.”



 2009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램버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 스스로가 ‘낮에는 영어 강사, 밤에는 예술가’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영어를 가르치러 간다. 낮 12시엔 다른 방과후 프로그램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오후 6시쯤 일이 끝나는데 그 이후나 주말에 영화를 찍는다. 나처럼 원어민 강사로 온 예술가가 많다. 화가, 댄서, 연극인도 여러 명인데 특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



 이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본지는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외국인 5명을 접촉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일을 ‘이방인 예술(expat art)’이라고 불렀다. 배타적인 의미가 담긴 ‘외국인’보다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사는 이를 뜻하는 ‘이방인’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2015년 서울에서 진행 중인 ‘이방인 예술’과 그 속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살펴봤다.



 ◆한국인 동포 차별과 빈부 격차도 소재=각각 연인, 동성애 관계인 세 남녀를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지는데 박원순 서울시장의 동성애 발언에 대한 라디오 뉴스, 가야금 연주 등 국악이 배경 음악으로 나온다(프랑스인 세바스티앵 시몽의 ‘동心’). 한국에 와서 서로에 대한 진실의 순간에 직면한 외국인 커플의 이야기에 한국의 노래방, 음주 문화가 등장한다(케빈 램버트의 ‘더 뷰 프롬 히어’).



 이처럼 한국에 사는 외국인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에는 한국의 다양한 면모가 담겨 있다. 주한 미군인 제임스 윌리엄스가 만든 ‘해방촌’에서는 한국 해방촌이 마피아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나온다. 이 작품은 미국 ABC 뉴스가 ‘주한 미군이 만든 작품’이란 점에 초점을 맞춰 조명하기도 했다.



 한국을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은 한국계 외국인이 많이 만들었다. 영화 ‘코메리칸 블루스’에서는 동포 여성이 한국에 와서 나이 많은 남성이 운전하는 택시에 탔다가 질문 공세를 당한다. 택시 기사는 처음엔 친절하다 여성이 동포임을 알고 행동과 문화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시대, 문화, 성의 차이와 오해를 그렸다.



 영화 ‘콜 코호’는 술에 취한 부자들을 데려다주는 대리운전자를 통해 한국의 빈부 격차를 지적했다. 영화 ‘겟 업’은 한국계 독일인이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를 만든 정승현(40)씨는 실제 광부, 간호사였던 부모에게 태어난 독일 동포 2세다. 2013년 한국에 온 뒤 서울 한남동 독일학교에서 체육과 종교를 가르치면서 방학 때 영화를 찍는다. 그는 “이산가족에 대한 영화도 만들고 있다”며 “분단 국가였던 독일 출신이기에 또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한국에서 살면서 영화 ‘백 오브 본스’를 만들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인 프랑스인 오를리앙 레네(33)는 한국의 세대 차이 관련 다큐를 만들고 있다. 그는 “한 곳에 오래 산 사람은 그곳 모습을 잘 못 보지 않나. 이방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못 보는 한국을 다룰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국 인디·이방인 영화제’에서 영화제를 준비한 이들과 외국인 영화인들이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영화제에서는 영화 50편이 상영됐다. [사진 케빈 램버트]


 ◆100여 명 활동하는 영화인 모임도=한국 내 외국인 영화인들의 커뮤니티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모임 ‘영화집단 1923’에서는 남아프리카·아일랜드·캐나다·콜롬비아·뉴질랜드에서 온 이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연고가 전혀 없는 외국인 37명에 한국계 외국인 등까지 100명이 넘는다. 한두 달에 한 번 만나 서로 영화 만드는 것을 돕고 투자자를 연결한다. 모임을 처음 만든 한국계 미국인 정소영(40) 이코믹스 부사장은 컬럼비아대 영화과를 졸업한 미국 제작자연합회 소속 제작자다. 그에게 물었다.



 -모임을 만든 이유는.



 “미국에서 한국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일을 하다가 스스로 만들고 싶은 다큐영화가 있어 한국에 왔다. 영화를 만드는 지인들을 서로 소개시키려고 모임을 만들었는데 모임이 커졌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돕고 있는데.



 “전 세계를 떠도는 사람, 낯선 곳에 사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공감을 얻는 게 이방인 영화다. 누구나 외국에 가면 혼자란 느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 들지 않나. 그런 경험을 영화화하고 나눈다.”



 그는 “모임 이름은 한국 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가 1923년에 상영된 데서 땄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한국 최초의 영화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외국인들의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모임명에 녹아 있다.



 한국에서 커진 외국인 영화인 커뮤니티의 힘은 지난달 18~21일 열린 제1회 ‘한국 인디·이방인 영화제(KIXFF)’에서도 드러났다. 영화제에서는 전 세계 50여 개국 이방인들이 출품한 150여 편 중 선별된 영화 50편이 상영됐다. 절반가량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출품했다. 영화가 서울 종로와 이태원, 신논현 등에서 상영되고 개막 파티가 신사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것도 한국에 사는 외국인 영화인들의 광범위한 조직력을 보여준다. 낙선 작품에 피드백을 주지 않는 다른 영화제와 달리 모든 출품작에 대해 피드백을 해준 것도 다른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화제가 됐다고 한다.



 ◆“외국인의 눈, 좋은 한류 콘텐트”=이처럼 영화에 열정적인 이방인들도 한국 영화인들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작가, 기업 광고 촬영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이가 많다. 부족한 돈을 모으려고 크라우드 펀딩도 한다.



 그러면서도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오를리앙 레네는 “어차피 한국이나 프랑스나 영화 만드는 사람은 다 힘들다.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미쳐야 한다”고 했다. 케빈 램버트도 “고향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 영화를 만드는 데는 더 자극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도 한국 영화계의 배타성은 아쉬워한다. 한국에서 웹드라마 영화제를 기획한 뉴질랜드인 데이비드 옥슨브리지(41)는 “한국에서 영향력이 큰 대형 제작사는 매우 배타적이고 수직적인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김현숙 케이무비러브 대표는 “한국의 이방인들이 만든 작품이 다른 나라 유명 영화제에는 초청 받아도 부산·전주 영화제에선 채택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소영 이코믹스 부사장도 “단순히 언어 장벽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도 한국 영화 커뮤니티에선 반기지 않는다”며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시너지를 기대하면 좋겠다”고 했다.



 CJ·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일했던 이진훈 이스트드림 대표는 “전문성 있는 한국 영화인들이 이방인과 함께하면 내용도 깊어질 것”이라며 “외국에서 다양한 삶을 산 이들의 시각으로 한국을 보는 작품은 좋은 한류 콘텐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방인 예술은 더 커질 전망이다. 한국에 연고가 없지만 한국에서 살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가브리엘 갈랑은 말했다. “세상은 매우 작아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결정을 하기 쉬워진 새로운 세대다. 그런 세대가 만드는 이방인 예술은 더 발전할 것이다.”





[S BOX] 한국영화 토론하는 외국인들



15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뉴질랜드인 데이비드 옥슨브리지(41)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다섯 번 넘게 봤다. 그는 “캐릭터와 마을이 재미있고 코미디와 공포가 섞여 있는 똑똑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저 한국과 한국 영화가 좋다는 그는 한국에서 프로덕션을 만드는 게 꿈이다. 현재도 영화제 기획자, 이벤트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뉴미디어와 뉴테크놀로지에서 한국은 변화가 빠르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고 싶다.”



 한국 영화가 삶에 영향을 미친 이는 더 있다. 2012년부터 KAIST 인문사회과학부에서 영화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대니얼마틴 부교수는 영국에서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고 전문 연구분야를 한국 영화로 정했다. ‘설국열차’ ‘국제시장’을 영어로 번역한 미국인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18년 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보고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갖고 결국 한국에서 살게 됐다.



 한국 영화를 아끼는 외국인들은 한국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모임 ‘케이무비러브’에서도 활동한다. 지난 3월 연 ‘살인의 추억’ 시사회에서는 토론이 다섯 시간 넘게 진행됐다.



 이 모임은 이명세 감독의 ‘형사’ 시사회도 열었다. 흥행에는 실패한 영화지만 마틴 교수는 “한국 영화 베스트 5 안에 드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들은 오는 11일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시사회를 한다. 김현숙 대표는 “궁극적으로는 (영어로 된) 한국 영화 비평 아카이브까지 구축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글=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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