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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의 경계

중앙일보 2015.07.04 00:02 종합 24면 지면보기
오민석
시인·문학평론가
근 16년 전 연구년을 해외에서 보냈던 일이 기억난다. 그 당시 외국에 처음 가봐서인지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문화에 매우 민감했는데 그때 내가 받은 문화적 충격 중 가장 큰 일은 해서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분명한 경계였다. 자유로운 대학캠퍼스에서조차 정해진 주차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은근슬쩍’ 차를 대면 한 시간 이내에 예외 없이 ‘딱지’가 붙었다. 운전면허증을 소지하지 않았을 경우엔 또 예외 없이 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사이의 구분이 명확했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하데스의 명령을 어기는 순간 명계(冥界)로부터 겨우 구해낸 아내를 다시 잃었다. 그가 아내를 다시 만난 것은 죽음의 정거장을 거친 다음의 내세에서였다. 나치의 전범들은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추적당하고 죄가 발각될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개인·사회 사이에 소위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위반하면 위반의 경중에 따라 반드시 책임을 묻는 것, 그리고 그것에 도무지 예외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숨이 막히는 일이기도 하다. 급할 때 적당히 아무 곳에나 차를 세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설사 경찰에 걸려도 대충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풀려날 구멍이 있는 우리의 현실이 어떤 때는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심지어 사람 사는 일이 다 이런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작금의 우리 현실을 보면 되는 일과 안 되는 일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또 언제나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관공서, 학교, 사업장, 언론, 법정, 말 그대로 어디를 가든 모든 곳에서 ‘어영부영’과 ‘은근슬쩍’의 문법이 통한다. 경계는 수시로 무너지고 징벌의 수위를 정하는 일에도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친일을 해도, 각종 사건을 조작해도,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도 결국은 어영부영 다 넘어온 게 우리의 근현대사다.



 이 ‘얼렁뚱땅’의 문법이 심각한 지경까지 온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작금의 표절 사태다. 어찌 보면 ‘진실의 마지막 보루’일 예술의 영역에서 표절(도둑질) 사태가 불거져 온 세상이 다 뜨거워졌다. 사람들을 더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표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무너진 것보다 그 원칙을 무너뜨린 행위에 대한 당사자들의 대응이었다. 해당 작가도 출판사들도 (그들이 지금까지 진리와 예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비판해마지 않은) ‘어영부영 학교’의 충실한 학생이 돼 있음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표절을 선명하게 인정하지 않았고 출판사들은 책임이 담긴 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예술 영역이니 만큼 이 사태에 법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작가와 출판사가 해서는 될 일과 안 될 일의 명백한 경계를 다시 생각하고 그 경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구체적인 처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르페우스가 죽음을 경유하고 나서야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적극적인 자기 징벌을 통해서만 작가와 해당 출판사들은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넘어갈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진실한 반성으로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는 길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할 때 구경꾼들도 그들이 (표절 외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진리의 이름으로 축적해온 소중한 성과들을 다시 인정할 것이다. 구경꾼들도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해당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 위해 수많은 작가가 줄을 서 있다. 출판 결정이 나도 때로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런 ‘권력’이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이 중 어떤 출판사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나쁜’ 권력과 목숨 걸고 싸웠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두려운가. 참된 반성이 진짜 힘이다.



오민석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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