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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벌거벗은 대통령

중앙일보 2015.07.04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일본 작가 가이코 다케시(開高健)의 단편소설 중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게 있다. 제목대로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인데, 1957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의 화실에 타로라는 학생이 들어온다. 화구회사 사장의 외아들이다. 그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애를 쓰고, 타로는 서서히 속을 열고 붓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화구회사는 안데르센동화를 주제로 한 사생대회를 개최한다. 응모작품은 하나같이 동화책 속의 삽화를 흉내 낸 것들뿐이었다. 타로의 그림은 달랐다. 주인공이 들려준 ‘벌거벗은 임금님’을 짧은 훈도시만 걸치고 활보하는 다이묘(大名·지방 영주)로 묘사했다. 상상력이 넘쳤지만 그의 그림은 심사위원들의 조롱만 받고 낙선한다.



 요즘 청와대와 집권여당 지도부의 갈등, 집권여당의 내홍을 지켜보며 떠오른 게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안데르센 것보다 가이코의 것이 더 어울리는 건, 안데르센 동화는 현실을 비추기엔 지나치게 유쾌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대요!”라고 외치는 순간 모든 사람이 집단위선에서 깨어난다. 왕은 추한 나신을 부끄러워하고 신하들은 거짓을 말한 걸 창피하게 여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진실을 말하면 조롱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치도곤을 당해야 한다. 왕은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신하들은 거짓을 말하면서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는다.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진노를 부른 건 사실 국회법 개정안이 아닌 다른 두 가지다. 대통령이 세금부담 없이 복지를 베풀어 보겠다는데 무엄하게도 “세금 없는 복지는 없다”고 외친 게 하나다. 안보는 (군인의 딸인) 대통령이 가장 경쟁력을 가진 우수과목이거늘, “사드 배치” 운운하며 이니셔티브를 가로챈 게 다른 하나다.



 하지만 복지가 거저 얻어질 수 없으니 틀린 말이 아니고, 사드 배치는 국방위 시절부터 가진 소신인데 어쩌랴.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과 집권당 원내대표가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자주 만나 조율해 나가면 그만인 것을,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다짜고짜 “자기 정치”요 “배신”이라 하니 치도곤이 아니고 뭐겠나.



 벌거벗은 왕보다 더 우스운 건 “옷이 멋지다”고 떠드는 신하들이다. 국회법 개정안으로 야당과 딜을 한 원내대표에게 “참 잘한 협상”이라고 칭찬하고, “위헌 소지도 없다”고 맞장구치던 사람들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안면을 싹 바꾸고 핏대를 세운다. 누구는 “청와대를 당의 출장소로 만들겠다”고 거품 물어 최고위원이 되더니 최우수 청와대 출장소가 돼 목청을 높인다. ‘그가 총리가 못 된 게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하는 그 인사다.



 타로의 그림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천박해요. 안데르센 같은 세계적 작가를 이런 지방주의로 이해시키다니요 ”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추구하던 일본이 그것을 성취했다는 환상에 젖어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비하하는 것이다. 스스로 국민의 대표에서 청와대의 충직한 일꾼으로 격을 낮추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선량들과 닮은꼴이다.



 심사위원들의 조소가 극에 달했을 때 주인공은 그 그림이 사생대회를 주최한 회사 사장의 아들이 그린 것이라고 말해 준다. 당황해서 목을 들이밀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심사위원들 등 뒤로 주인공은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통쾌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심사위원들은 거짓의 옷을 보는 놀라운 안목으로 심사를 계속할 테고 타로는 늘 낙선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현실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부끄러움을 알고 옷을 챙겨 입을 것 같지 않고, 거짓의 옷을 보고 감탄하는 주위의 재주넘기도 계속될 게 분명하다. 그때마다 치도곤 당하는 타로들이 얼마나 더 나올지….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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