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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체념의 덫에 걸린 한국 사회

중앙일보 2015.07.04 00:02 종합 27면 지면보기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국무총리
내가 어릴 때 자주 들은 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빽’이 있으면 안 될 것도 되고 빽이 없으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흐리멍덩한 부패 사회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의욕이 있었고, 그 집단적 의욕이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요즘에는 새로운 흐리멍덩 현상이 나타났다. 그냥 체념해 버리는 것이다. 마치 몽은주사 맞은 환자처럼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심각한 위기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유승민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치의 부재,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경제위기, 아직도 해결책이 잘 안 보이는 지역적·이념적 갈등, 부드러운 말이 아쉽기만한 국가의 낮은 품격 등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정말로 심각한 위기는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크게 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망하지도 않는 경제에 기댄 채 별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루하루 표류를 거듭하면서 목표는 상실되고 심각한 정체성 위기로 불안감은 고조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왜 다이내믹 코리아가 체념의 나락으로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마모시킨 덫은 아주 많지만 오늘은 민주주의의 덫, 재벌의 덫을 이야기해 보자. 이 두 가지는 과거 한국 사회가 이룬 ‘자랑스러운’ 성과였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우리 자신을 옥죄는 덫이 됐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 덫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포장된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잊어버리고 미지의 새로운 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우리 사회가 정치민주화를 이룬 지 거의 30년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솟구치던 1980년대 말을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 국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본 형식을 갖춘 것 외에 우리 정치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목표, 이에 대한 국민의 합의, 여러 가지 갈등구조의 해결 등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실망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정권은 이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했다가 또다시 실망하고 넌더리를 내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정치권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버릴 때가 됐다. 정치 문제를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민주주의를 몇 년에 한 번씩 치르는 선거 문제로만 한정하는 ‘민주주의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경제 분야의 핵심적 과제는 ‘재벌의 덫’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재벌은 이제 어찌할 수 없다는 체념이 만연돼 있다. 국가 경제의 재벌 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재벌 성장 과정에서 국가가 부여한 각종 혜택과 특권에 대해 혐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재벌의 경제적 성과가 중소기업과 서민에게도 떡고물이 돼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양면성을 보여 왔다. 단기적 생존을 위해 재벌에 의존하면서도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재벌 이외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재벌들도 중국 등 해외로부터의 경쟁 압력으로 인해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한 혁신과 창조의 에너지가 재벌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새로운 세대는 물론 기성세대의 홀로서기도 어렵게 하고 급기야 국제경쟁력도 약화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재벌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덫과 재벌의 덫을 극복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치 문제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방치하고 경제 문제는 재벌들에 의존하는 식의 체념의 의식구조를 버려야 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나 판단을 정지한 채 하루하루를 의식 없이 지내거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나 변화에 대한 의욕 없이 무기력하게 체념하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범국민적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양심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리의 미래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자.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우리 사회 전체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길을 트자.



 ◆약력=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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