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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오늘 미술관] 천경자 - 막(幕)은 내리고

중앙일보 2015.07.02 15:37
천경자, 막(幕)은 내리고, 41×31.5㎝, 1989.




"내가 아기 기르고 학교 선생 노릇하며 여자로서 가장 알차게 살았다고 여겨지는 지난 30대의 그리운 사연들이라든지, 감로수(甘露水)처럼 갈증을 풀어주었다고 생각되는 작은 영광 같은 것이 지금에 와서는 흘러간 영상을 보듯 남의 일 같기만 하고 희미하기만 하다. 그것은 50이 넘은 나이에서 느끼는 허무한 과거겠지만 그래도 나는 모래탑 속에 들어앉아서 앞으로의 인생을 향해 나머지 모래탑을 마저 쌓아올리기에 열중한다."(천경자 수필집 『자유로운 여자』 중에서)



천경자(91) 화백은 뉴욕서 투병중이다. 10년 넘게 돌보고 있는 장녀인 섬유미술가 이혜선(72)씨에 따르면 "거동은 못하나 의식은 있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다. 잊힌 듯했던 그는 지난해 뉴스에 등장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에게 매월 송금하던 180만원의 회원 수당 지급을 중단하면서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10년 이상 근황 확인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병원진료기록이나 사진이라도 보내달라는 예술원측 요구에 이씨는 명예훼손이라며 강하게 거부, 어머니를 예술원 회원에서 제외해 달라며 탈퇴서까지 냈다. 예술원은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수락할 수 없다고 맞섰다.



천씨가 65세에 그린 그림 '막은 내리고'가 국내 첫 공개된다. ‘막은 내리고’는 책으로만 알려졌던 그의 80년대 대표 이미지다. 미국인 소장가가 간직해 오던 것이 최근 국내에 들어와 14일 서울 신사동 K옥션에서 경매된다. 추정가는 8억5000만원. 경매에 앞서 작품을 공개하는 프리뷰는 4∼13일이다.



화가는 말이 없고, 그의 분신 같은 그림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다. 쉰을 넘기며 허무한 마음을 토로한 예전의 수필이 새삼스럽게 읽힌다. 화가가 쌓아올린 모래탑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지금도 '인생을 향해 나머지 모래탑을 쌓아올리기에' 열중해 있을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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