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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치프라스의 위험한 도박이 던지는 메시지

중앙일보 2015.07.01 00:03 종합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김종윤
중앙SUNDAY경제산업에디터
6월 27일 토요일 오전 1시(현지시간)는 역사에 남을 순간이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41), 그는 그리스 역사상 최연소 총리다. 승부사 기질로 무장했다. 깊은 밤에 TV카메라 앞에 섰다. 전 세계를 상대로 반전 카드를 꺼냈다.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발표는 극적이었다. 채권단과의 협상은 정부가 할 일이다. 그는 전선을 교묘하게 틀었다. 국민을 볼모로 내세웠다. ‘국민투표’는 판돈이 거의 소진됐을 때 꺼낸 올인(다 걸기) 카드였다.



 치프라스는 협상의 생리를 잘 아는 인물이다. 그가 처음부터 이번 협상에서 쓸 수 있는 카드는 딱 한 개였다. ‘벼랑 끝 전술’. 그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이끌고 올 1월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했다. 그리스인들은 2010년 트로이카로부터 1차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6년간 가혹한 긴축정책에 시달렸다고 생각한다. 세금은 크게 뛰었고 임금과 연금 지급액은 확 깎였다. 그들이 보기에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유럽연합) 채권단은 무자비한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었다. 이 틈새를 치프라스가 파고들었다. 긴축 반대, 최저임금 인상 등을 외쳤다.



 그리스 유권자들의 반발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는 그들 또는 그들의 앞 세대가 뿌려 놓은 씨앗에서 비롯됐다. 2001년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 현재는 19개국)에 가입하면서 국민은 돈벼락을 맞았다. 이 돈, 대부분 빚이다. 드라크마화를 쓰던 그리스가 유로화를 쓰면서 위상이 바뀌었다. 독일·프랑스 등과 어깨를 같이했다. 낮은 금리에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자 쉽게 빚을 내서 흥청망청 썼다. 불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연금제도도 곪을 대로 곪았다. 한때 그리스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90%나 됐다. 은퇴해도 일할 때와 비슷한 수입이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60세 이상이었다(지금은 65세 이상이다). 580개 위험 업종에 종사하면 60세 이전에도 연금을 받았다. 황당하게도 미용사나 TV·라디오 프로그램의 사회자도 위험 업종에 포함됐다. 미용사는 몸에 해로운 염색약을 다룬다는 이유로, TV·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는 마이크에 묻을 수 있는 박테리아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일찍 연금을 받았다. 나라 곳간이 거덜난 건 당연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남유럽 재정위기라는 퍼펙트 스톰이 그리스를 덮쳤다.



 결국 트로이카에 손을 내밀었다. 공짜 돈은 없는 법이다. 뼈를 깎는 긴축 요구가 따라붙었다. 시리자의 반대 구호는 강렬했다. 허리 띠 졸라매지 말자고 했다. 빚 깎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유권자는 없었다. 이렇게 집권한 치프라스가 공약을 물리는 건 자살행위다. 채권단의 긴축 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퇴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협상을 깨고 디폴트(국가부도)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가기엔 힘이 부친다.



 유로존에서 나와 드라크마화를 다시 도입하는 순간 그리스 경제는 결딴날 가능성이 크다. 물가가 치솟고 자본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 경기 침체는 심각해지고 국가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치프라스는 이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와 자신의 운명을 국민투표라는 외통수에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긴축 반대라는 포퓰리즘이 표를 모으는 데는 효과가 있어도 나라를 운영하고 지키는 데는 독이 된다는 걸 그는 꿰뚫고 있었다.



 그가 장렬히 전사할지 기사회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치프라스의 도박이 영광의 역사로 기록될지 치욕의 역사로 점철될지는 그리스 국민의 몫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리스 국민의 고통분담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무자비한 긴축 안을 몰아붙인 채권단을 원망하겠지만 채권단은 죄가 없다. 그들은 긴축을 요구할 권한이 있다. 이미 그로기 상태인 그리스에 압박만 하지 말고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새로운 성장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채권단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만큼 그리스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물이요, 군주는 배라고 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 그리스 국민은 치프라스라는 배를 일단 띄웠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 국민이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정부를 선출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망망대해에서 그 배는 태풍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과연 이 배가 전복될 것인가, 무사히 안전항로를 찾을 것인가.



 그리스의 위험한 항해는 우리에게 무거운 메시지를 전한다. 책임 있는 정치란 무엇인가.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에 유권자가 휘둘리면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과한 복지 공약을 내놨다. 그 공약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선된 박 후보가 내건 ‘증세 없는 복지’는 사실상 공수표로 판명 났다. 낙선한 문 후보 역시 복지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유권자들이 “속았다”고 땅을 쳐봤자 소용없다. 결국 눈 밝은 유권자가 위대한 지도자를 골라내는 법이다. 우리가 그리스 사태를 통해 배울 것은 물이 깊어야 큰 배를 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김종윤 중앙SUNDAY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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