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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88세 일본 할머니의 ‘소울푸드’

중앙일보 2015.06.26 00:01 Week& 2면 지면보기










































지난 12일 오후 8시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시. 후미진 골목에서 낡은 이자카야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모가라(いもがら)’. ‘미야자키 사내들’을 뜻하는 지역 사투리였다. 허름한 분위기에 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네 평 남짓한 작은 가게였다. ‘ㄱ’ 자로 이어진 바 테이블에 양복 차림의 중년남자 둘이 따로 앉아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바 안쪽 주방에 서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봤다. 모든 메뉴가 300∼500엔이었다. 비싸야 5000원 안쪽이었다. 사케 한 잔을 시켰더니, 접시로 받친 유리 컵 위로 사케가 넘쳐 흘렀다.



주점의 분위기는 느긋하고 편안했다. 두 중년남자는 오랜 단골인 듯, 주방 할아버지와 스스럼없이 말을 섞었다. 대화가 끊기면 홀로 술을 홀짝였고, 주방 구석에 놓인 TV를 함께 시청했다. TV에서는 한 일본여성이 좌충우돌하며 음식을 배우고 있었다. 작은 가게를 채운 늙은 남자들이 소리 내 웃었다. 시간이 흐르자 한 아저씨가 꾸벅꾸벅 졸았다. 다른 아저씨는 통성냥을 켜 담뱃불을 붙였다. 내 자리 앞으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갔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주방 할아버지의 어머니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원래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했는데 올해 미수(未壽)를 맞은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4년 전부터 자신이 주방을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 늙은 아들은 올해 예순일곱 살이라고 했다. 손님들도 30년 이상 묵은 단골이라고 했다. 거의 매일 퇴근길에 들러 밥도 먹고 술도 마시다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7시쯤. 지난밤을 잊지 못하고 다시 가게를 찾았다. 어제와 달라진 건 없었다. 늙은 어머니와 덜 늙은 아들이 있었고, 꾸벅꾸벅 졸던 아저씨도 있었다. 할머니는 60년 동안 가게를 했는데, 우리 일행이 최초의 한국인 손님이라고 말했다. 어제처럼 사케와 두부부침을 시켰다. 밤 11시가 다 됐다.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용기를 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기자입니다. 이 가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부탁합니다. 은퇴하신 건 알지만, 할머니가 간단한 요리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평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할머니는 주섬주섬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의 익숙한 몸짓으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앞에는 시금치나물과 가지무침을 담은 두 접시가 놓였다. 할머니가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먹어봐요. 내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야.”



접시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시인 함민복의 설렁탕 국물이 생각났다. 나에게도 ‘소울푸드’라고 말할 수 있는 음식이 생긴 순간이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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