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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미 방위조약 이끌어낸 반공포로 석방

중앙일보 2015.06.25 00:02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일주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전 이승만기념사업회 사무총장
1952년 5월 말, 6·25전쟁의 지휘부가 있는 피란수도 부산.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가 헌병대에 연행되고 악명 높은 백골단 땃벌떼가 동원되어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 정치파동이 그 서막을 연 것이다. 두 달 전 미국은 이승만에게 휴전협정에 찬성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우남(雩南) 이승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휴전을 원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병력 증강이 선행돼야 한다고 버텼다.



 사사건건 독자 행동으로 치닫는 우남에게 미 국방성은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일명 ‘상비군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통해 우남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당시 제2대 국회는 건국을 주도했던 제헌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낙선한 상태였다. 대신 북한과의 대화와 통일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돼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창 양민 살해사건이나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이승만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미 연합사령부는 우남의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일부 군인들과 야당을 앞세워 우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부산 정치파동은 우남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미 군부에 선제공격을 가한 자기방어적 성격의 정변이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밀어내려는 미국의 시도는 세 번이나 있었다. 그 시도는 53년 7월 휴전이 서명될 때까지 계속된다.



 지난 6월 18일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62주년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모든 나라는 자국의 국익을 위해 싸운다는 지극히 평범한 국제정치의 원리다.



 당시 미국은 내부적으로 반전운동이 맹렬했다. 5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전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한 미국 국민은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전쟁을 끝내라고 촉구했다. 파병 규모가 두 번째로 큰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 군대가 영국 지배하의 홍콩으로 언제 밀려들지 몰라 처칠은 전전긍긍했다.



 그 당시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싫어했던 것은 당연했다. 일단 조약이 체결되면 전세가 불리해지더라도 국제법이나 국제 여론 차원에서 군대 철수는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세계 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 중심의 국제 질서로도 얼마든지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미군이 구태여 한반도에서 발목 잡힐 이유가 없다는 것이 당시 미 국무부의 판단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아닌 한국에 대한 단순한 병력 지원과 군사 원조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를 대한민국의 생존 차원에서 접근했다. 한국의 안전보장이 담보되지 않은 휴전은 시쳇말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죽는 것은 하루 차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달려든 것이다. 휴전이 되어버리면 말로만 떠들어대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문제는 급격히 동력이 떨어질 것으로 우남은 내다봤다.



 그래서 그는 휴전 조인이 예상되던 53년 6월 18일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연합국 측이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맥이 빠져 있었던 공산 측 양쪽 모두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을 ‘북진 통일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인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남에게는 엄청난 협상력이 생겨났다. 반공포로 석방 이틀 후 우남은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로 미국이 한국을 떠나겠다고 하면 떠나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일은 삼가라”며 역으로 반공포로 석방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고 있다. 심지어 중공 대표 우슈취안(伍修權)은 적국인 미국과 힘을 합쳐 이승만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농담까지 했다.



 결국 미 대통령 특사로 한국을 방문한 로버트슨은 우남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미 상원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인준을 확약시켜주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외교책략가 이승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휴전협정 준수’를 요구하는 미국 측에 끝까지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라는 정도의 기록만을 남겼다. 그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관심을 끌고 갔던 것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그 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남을 평가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승만은 ‘너무나 마음에 안 드는 동맹자’였으며 ‘공산주의자만큼 미국을 힘들게 했던 자’였다고 회고한 것이다.



 지금 동북아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북한 변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미국과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그리고 중국과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가 걸려 있다. 우남이 헤쳐 온 국난 극복의 역사를 공부해 용기와 지혜의 정치를 펼쳐야 할 때다.



김일주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전 이승만기념사업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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