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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 대통령, 중국 초청에 어떻게 답할까

중앙일보 2015.06.24 00:02 종합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다. 시험은 힘들다는 점에서 대개 시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잇따른 시험에 부닥친다. 한·중 관계의 경우 1992년 수교 이후 시험에 든 건 주로 중국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했기에 중·대만 사이에서 눈치 볼 일은 별로 없었다.



 반면에 중국은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느라 적지 않게 시험에 들었다. 북핵 제재를 논의하는 유엔 무대가 한 예다. 한국은 중국이 북한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실효성 있는 제재를 가하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한다며 ‘의리 없다’고 비난한다.



 시진핑(習近平) 집권 이후 중국은 시험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북한을 특수 국가가 아닌 여느 국가로 대하기 시작하면서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엔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거리낌없이 참여한다. 반대로 최근 시험에 들고 있는 건 우리다. 많은 경우 미·중 사이에 낀 결과다.



 최근 불거진 대표적 문제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한국이 참여치 말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결과는 참가로 정리됐다. 사드는 반대로 중국이 한국에 도입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중국의 바람대로 될 것 같진 않다.



 이제 또 다른 시험이 한국을 기다리고 있다. 오는 9월 3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냐 여부다. 이날 행사는 올해 중국이 가장 역점을 쏟는 사업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미조리함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했고, 중국은 이튿날인 9월 3일을 항전 승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까지는 이 기념일을 국내 행사로 치렀으나 올해는 성대한 국제 행사를 계획 중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가 서방의 노력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세계에 각인시키려는 의도다. 아시아 전장에선 중국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일제(日帝)를 타도했음을 널리 알려 아시아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또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한편 현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겐 역사인식을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물론 이런 모든 활동에서 중국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부각시켜 달라진 중국의 위상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이날을 아예 공휴일로 지정하는 한편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도 기획하고 있다. 이런 옥외 행사를 잘 치르려면 맑은 날씨와 대기오염 제거가 필수라는 판단 아래 이미 베이징의 하늘을 푸르게 만들자는 운동에 돌입한 상태다.



 그리고 행사를 빛내줄 외빈 초청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참석은 확실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유럽의 많은 지도자가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시진핑이 방한했을 때 이미 공동 행사 개최를 제안한 바 있는 중국은 박 대통령 초청에도 안간힘이다. 지난달 서울을 다녀간 탕자쉬안(唐家璇) 전 국무위원에 이어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중국 권력 서열 3위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국회 격) 상무위원장 역시 박 대통령을 만나 특별한 초청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의 초청에 어떻게 답해야 하나. 신중론을 펴는 이들은 행사 명칭이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라 일본을 지나치게 자극할 우려가 있고, 또 중국의 열병식(閱兵式)에 참석할 경우 자칫 중국의 군사력 과시에 들러리를 서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며 부정적이다.



 반면에 긍정론 입장에선 우리 광복군이 중국 대륙을 전전하며 항일 전쟁에 나선 역사가 있는 터에 꺼릴 게 무엇인가, 또 이번 행사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참석 가능성이 커 박 대통령이 참석할 경우 남북관계 개선의 큰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참석하자니 일본을 ‘왕따’시키며 눈에 띄게 중국 편에 붙는 것 같고, 안 하자니 한·중 및 남북한 관계 등에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로선 쉽지 않은 또 하나의 시험에 들게 된 셈이다. 일각에선 대안으로 대통령 대신 총리 등 고위 관료 파견을 거론하기도 한다.



 박 대통령이 참석하기엔 아무래도 ‘중국인민 항일전쟁’이란 이름이 걸린다. 중국이 국내 행사라면 어떻게 부르건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외빈을 초청해 국제행사로 치르려면 보다 외교적인 고려가 가미된 행사 진행이 필요하겠다.



 ‘항일’에서의 일(日)을 일제(日帝)로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는 ‘항일’ 대신 ‘항전’으로 쓰거나 그저 ‘반파시스트 전쟁’이라 표현하는 것도 방법일 듯하다.



 중국은 이번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는 이유로 역사의 경험을 잊지 않음으로써 창조적인 미래로 나아가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물론 일본 지도자도 행사에 참석해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화합을 외칠 수 있도록 행사의 명칭과 내용 등에서 보다 포용적인 기획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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