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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지고 가는 저 여인들 … 박수근, 희망을 보았네

중앙일보 2015.06.23 00:20 종합 22면 지면보기
박수근은 유독 여인네를 많이 그렸다.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듯한 만년의 유화 ‘강변’(1964·38×89㎝). [사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여자들이 걷는다. 강변의 저 왼쪽 여자는 치마저고리에 머리를 땋아 내린 아가씨다. 어디를 향해 가는 일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듯, 저만치 강물을 쳐다보고 있다. 가운데 여자는 머리에 뭔가를 이고 간다. 쪽진 머리가 기혼임을 알려준다. 검둥개가 뒤따른다. 오른쪽 여자는 이고지고 간다. 작은 아이는 업고, 큰 아이는 손잡고 걷는다. 마음이 분주한지, 강물 따위엔 눈길도 안 준다. 때는 겨울, 나무가 앙상하다. 이 겨울을 견디고 나면, 나목에도 잎이 나고 꽃이 필 게다.

폐막 5일 앞둔 국민화가 특별전



 세 여자는 마치, 한 사람 같다. 조선시대 풍속화로 ‘평생도(平生圖)’가 있다.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 될 만한 경사스러운 일들을 골라 그린 여덟 폭 가량 병풍이다. 돌잔치·혼례·회혼례 등 의례와 관직에 나간 선비가 거치는 벼슬살이 등을 담았다. 박수근(1914∼65)은 한 여자의 일생을 한 화면에 그리고 싶었나보다. 선비의 일생을 담은 평생도와는 또 다른, 현대판 평생도 말이다. 세상을 뜨기 한 해 전 그린 ‘강변’(1964)이다.



 박수근은 평생 여인, 그것도 일하는 여인을 그렸다. 아이를 업은 채 절구질하는 아내, 집집이 기름을 팔러 다니는 이웃, 그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퇴근할 때 버스 정거장에서 늘 만나던 과일 행상 등. 그의 그림엔 소녀조차 동생을 업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 속에 아기를 업거나 책을 읽는 소녀로 등장했던 장녀 인숙씨는 “아버지의 그림 소재는 멀리 있지 않고 가족들, 주변 노점상 등 가까이에 있었다. 나가실 때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가셨고, 연필도 제가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 깍지 껴서 쓰셨다”고 돌이켰다.



왼쪽부터 일하는 아내를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1954), 글을 몰라 편지를 읽어 달라 부탁하러 드나들었던 이웃을 모델 삼은 ‘기름장수’(1953), 동생 업은 큰딸을 그린 ‘길가에서’(1954). [사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는 박수근 50주기 특별전 ‘국민화가 박수근’ 폐막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무와 두 여인’ ‘노인과 소녀’ ‘길가에서’ ‘빨래터’ 등 대표작 50여 점을 한데 모았다. 아내 김복순씨가 미술잡지 ‘선미술’에 연재했던 글은 50주기전 폐막에 즈음해 단행본 『박수근 아내의 일기』(현실문화)로 첫 출간됐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그 해설에 “박수근이 남자보다 여인과 소녀상을 더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서민의 희망을 오히려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약한 여인의 몸이지만 어진 마음으로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따스한 온정이 느껴지는 그분들이 박수근 그림의 주인공으로 된 것”이라 썼다.



박수근은 아내와 딸, 주변 사람을 그렸지만 관객들은 그의 그림에서 어머니를, 누이를, 자기 자신을 본다.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화가, 박수근은 여자만큼이나 나목을 많이 그렸다. 거기서 딸은 아버지를 본다.



박인숙씨의 말이다. “‘나무와 두 여인’ 속 나무는 내게 아버지와도 같다. 가난했지만 가족들에게 늘 뭔가 해 주고 싶어했던 아버지 말이다. 봄이 되면 나목에도 꽃이 핀다. 이걸 보면 나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중앙일보 창간 50주년, 박수근 50주기 특별전 ‘국민화가 박수근’=오는 28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 전시장. 전시 입장료 성인 8000원, 초·중·고생 6000원. 02-2153-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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