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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메르스와 데카메론식 각성

중앙일보 2015.06.23 00:02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수경
화가
조교가 출근하지 않았다. 항상 해맑은 모습으로 맞아 주던 그녀를 두 주째 보지 못했다. 메르스 감염 의심환자로 지목돼 자가격리(自家隔離) 중이란다. 타 학과에는 한 학생이 메르스로 입원했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사소한 기침만 해도 사람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물러난다.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두렵다.



 기관지가 예민하고 도로 가의 화실에서 종일 일하는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메르스는 황사나 미세먼지처럼 지수로 예측되지 않기에 더 무섭다. 그것은 언제든 어디서든 스멀스멀 다가와 사람을 숙주로 삼고 스스로 복제해 증식한다. 그리고 곧 소문처럼 퍼질 기세여서 모두를 가슴 졸이게 한다. 면역력이 약할수록 더 많이 희생된다는 보도는 나와 같이 약한 기관지엔 끔찍한 뉴스다.



 14세기 중반 유럽의 흑사병은 인구의 30% 이상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일을 몸소 겪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데카메론(Decameron)』에서 흑사병으로 뒤바뀐 이탈리아 사회를 그렸다. 1348년 3월과 7월 사이에만 피렌체에서 10만 명 넘게 숨졌다. 이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는 절박하고 야박한 마음을 품고 세 가지 길을 선택하더란다.



 안전한 곳에서 사치와 향락을 절제하며 타인과 격리된 사람들, 곧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향락을 즐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곧 다들 죽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숨과 재산을 돌보지 않고 모든 소유를 예사로이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마다 대재앙을 맞은 반응은 개인 간 분리의식, 향락 추구, 공공개념(public)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인간은 신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생존 방식을 결정해야 했다. 역설적으로 대재앙을 통해 이런 자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출현했으며, 르네상스가 앞당겨졌고, 비로소 계급· 지위·성별에 상관없이 개인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근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19세기까지 잔존했다.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 있는 앙투안장 그로(Antoine-Jean Gros)의 그림 ‘자파의 페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나폴레옹’은 폭이 7m가 넘는다. 그 크기와 규모가 관객을 압도한다. 이 그림에서 나폴레옹은 장갑을 벗은 채 친히 흑사병에 걸린 병사의 몸을 만지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자애로움과 용기가 넘친다. 실제로는 방문 후 그가 전염을 염려해 병든 자신의 병사들을 죽였다고 한다. 자신의 손발인 병사들을 어쩔 수 없이 처형하는 동시에 대중이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하려는 나폴레옹의 계산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 질병의 치료에 실효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러한 보여주기는 선의로든 무엇이든 불가피한 것인가 보다.



 이번 메르스의 유행이 흑사병이 훑고 지나간 유럽의 참상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이러스는 주변을 배회하고 그래서 두려움은 나날이 늘어난다. 이 와중에 서로 불신하는 개인, 선전에 바쁜 위정자, 교만에 찬 재간꾼들이 곳곳에 나타나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려움에서 촉발된 어려움과 괴로움이 만연하는 때다. 보카치오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인정”이라고 한다. 인정은 국가에 대한 신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의탁하고 기대하는 대중보다 스스로 각성하고 결정하려 노력하는 개인에 의해 실천되고 또 끼리끼리 베풀어지는 것일 듯하다.



 과연 누가 메르스가 내습한 병든 도시와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까. 보카치오의 논리를 빌리자면 바로 우리 개인들, 그리고 아픈 이웃들과 함께하고 협력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영웅 또한 헷갈릴 일이 아니다. 지금 메르스와의 전쟁에서 방호복을 입고 힘겹게 싸우고 있는 메르스 전사들이야말로 우리가 찾고, 화가들이 화폭에 남겨야 할 영웅이 아닐까···. 데카메론은 열흘간의 이야기다. 이제 메르스도 한 달이 넘었다. 오랜 부재의 그 조교에게 카카오톡이라도 넣어볼까 싶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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