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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청와대의 상식과 언론의 상식

중앙일보 2015.06.23 00:02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터키에서 온 언론인을 최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터키에서 가장 큰 민영 뉴스통신사 사장이다. 기자 출신으로 언론사 사장이 된 그는 터키의 언론 상황에 대해 장탄식을 쏟아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맞물려 언론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터키의 언론 탄압 실태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열거한 사례들 중에는 대통령실이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압력을 행사하고, 비판적인 언론사를 정부 광고 배정에서 제외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의 불똥이 엉뚱하게 언론계로 튀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대병원을 방문했을 때 병원 곳곳에 붙어 있던 ‘살려야 한다’는 문구가 불씨였다. 청와대의 ‘연출’을 의심한 네티즌들이 만든 패러디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줄을 잇자 한 일간지가 이를 기사화했다. 얼마 후 청와대 홍보수석이 그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게 기사가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편집국장은 “그 판단은 우리가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걸로 끝났으면 에피소드로 묻혀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주 말 도하 각 신문 1면에 실린 메르스 관련 정부 광고에서 유독 그 신문만 빠지면서 에피소드는 뉴스가 됐다. 해당 신문사 노조는 이를 청와대 홍보수석의 항의 전화와 연결시켜 미운 털 박힌 언론사에 대한 ‘광고 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는 예산 부족 때문이라면서도 하필 그 신문만 제외된 이유에 대해서는 명쾌한 설명을 못 내놓고 있다. 정부 광고를 이용해 언론을 길들이려는 시도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한 상황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특정 기사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이 정부 광고 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한국이 터키 수준의 국가로 전락하고 있다는 징표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본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말한다. ‘기사가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은 해당 기사가 기사로서 요건을 갖췄다고 보는지 물어본 것이지 기사 가치에 대한 판단을 문제 삼은 건 아니라는 해명이다. 기사 요건이든 뉴스 가치든 그 판단은 언론사 고유의 몫이다. 그 판단에 대한 평가는 독자나 시청자가 할 일이다. 저널리즘의 ABC에 속하는 얘기다. 보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뉴스에 대한 판단을 문제 삼는 것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언론 자유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에서 30년 넘게 종사한 청와대 홍보수석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전화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청와대 분위기라면 그게 진짜 문제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통해 수준 미달인 청와대 실무진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정상적인 소비 활동을 독려할 목적으로 박 대통령이 서울 동대문시장을 방문한 사실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돌리면서 청와대 홍보팀은 갑자기 나타난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듯 상인과 행인들이 대통령을 열렬히 환호한 것처럼 묘사했다. 메르스로 나라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황임을 감안하면 맨 정신으로는 내놓기 민망한 보도자료였다. 그걸 보고 공감할 국민이 있었다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치인 29%까지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참 언론인 출신이 홍보수석과 대변인으로 있는 청와대에서 어떻게 그런 자료가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의아할 뿐이다.



 정부는 여론에 떼밀려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가 된 병원들 명단을 공개하고, 삼성서울병원에 대해서도 뒤늦게 부분폐쇄 명령을 내렸다. 그게 무슨 자랑할 업적이라도 되는 양 청와대 홍보팀은 둘 다 대통령의 직접 또는 간접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문자를 출입기자들에게 보냈다. 민간인인 삼성서울병원 원장을 대통령이 야단치는 시대착오적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낸 것도, 메르스 사태 와중에도 국회법 개정안의 부당성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전화를 부지런히 돌린 것도 지금의 청와대 홍보팀이다. 아무리 쪼들려도 앞뒤는 살피며 일을 해야 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이상 언론인 출신도 청와대로 직장을 옮길 수는 있다. 직업이 달라지면 처지도 달라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박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사람을 볼 줄 모르거나 제대로 된 인물을 끌어당길 매력이 없거나 애써 뽑은 인재를 두고도 쓸 줄 모르거나 셋 중 하나다. 이달 초 총선에서 터키 유권자들은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의 단독과반 아성을 무너뜨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뼈아픈 일격을 가했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내년 4월이면 한국도 총선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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