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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낡은 사진 뒤엔 '육수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중앙일보 2015.06.22 00:11 종합 20면 지면보기
 
냉면 면발을 뽑을 때 썼던 전통 기구 ‘분창’.
아무 맛도 아닌 듯 심심한데 돌아서면 생각나는 마성(魔性)의 음식, 냉면의 계절이다. 냉면 매니어와 음식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서울·수도권의 신흥 냉면 맛집 네 곳을 소개한다. 모두 저만의 수련 과정을 거쳐 강호들을 위협할 육수와 면발을 뽑아내는 집들이다. 유독 매니어가 많은 냉면의 세계는 강호들이 겨루는 무림과 같다.

[맛있는 월요일] 냉면 명가에 도전장, 신흥 맛집 4곳

서울과 수도권에 4대 혹은 5대 천황으로 꼽히는 냉면집이 꼭대기에 떡 버티고 있다. 대부분 평양에서 냉면집을 하다가 내려왔거나 이북에서 해먹던 맛을 기억해 재현해낸 집들이다. 대부분 30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전통의 냉면집 위세가 워낙 강한 탓에 새로 시장에 진입하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평가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내력 10년 안쪽의 냉면집이 속속 강호에 진입하고 있다.


툭툭 끊어지는 100% 메밀면 사용
천일염으로 간 맞춰 국물 맑아

경기 성남 능라

 

발음도 쉽지 않은 생소한 이름 ‘능라’는 평양 대동강 안에 있는 섬이다. 당연히 정통 평양냉면이 이 집의 대표 메뉴다. 김영철(56) 사장은 냉면 바닥에서 낯선 인물이다. 환경 관련 사업을 하다 2011년 불쑥 분당 판교에 냉면집을 열었다.

 “평양 출신 아버지가 대단한 냉면 애호가셨어요. 손맛도 좋아서 냉면을 잘 만드셨죠. 작고하신 뒤 우연히 메모를 발견했는데 낡은 사진 뒤에 빼곡하게 냉면 육수 레시피를 적어 두셨더라고요.”

 그만한 유산이 없었다. 김 사장은 그 길로 사업을 접고 냉면에 매달렸다. “처음엔 ‘평양면옥’ ‘을지면옥’ 같은 유명 냉면집에서 기웃거리는 게 일이었어요. 쓰레기통을 뒤져 식재료 원산지를 알아내고 귀동냥으로 면 다루는 기술을 배웠죠. 1년간 육수와 면에 빠져 살았더니 아버지의 평양냉면 맛이 나오더라고요.”

육수는 ‘++ 등급’의 한우와 암퇘지, 표고버섯 등으로 맛을 낸다. 간장 대신 천일염으로 간을 맞춰 국물이 맑다. 능라는 가게 인근에 창고를 둬 메밀의 신선도를 유지한다. 사흘 전 도정한 메밀을 그날 제분하고 반죽해 면으로 뽑는다. 입에 넣으면 향긋하고 담백한 메밀 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육수는 잡내가 없어 개운하다. 식초 등 어떤 양념도 치지 않고 먹길 권한다. 능라는 오는 10월 ‘능라도’로 이름을 고쳐 옆 건물로 확장 이전할 예정이다. 같은 달 서울 논현동에 분점도 연다. 평양냉면 1만원. 031-781-3989.


평양 선교리 출신 부모 가업 이어
동치미 뺀 육수 … “정답 따로 없어”

서울 여의도 정인면옥

 

“아직도 마음에 안 들어요. 진짜 맛있는 평양냉면을 만드는 건 영 풀리지 않는 숙제 같아요.”

 정인면옥 주인 변대일(55)씨가 엄살을 피운다. 식당이 여의도에 들어선 게 지난해 4월이니 그럴 만도 싶다. 한데 냉면 맛은 거침이 없다. 뜨끈한 면수 한 잔 들이켜니 금세 냉면이 나왔다. 얼리지 않은 국물은 맑은 편이었다. 냉면 사발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소 양지와 사태로 푹 고았다는 설명대로 묵직한 고기 맛이 전해졌다. 굵은 면발은 메밀 함량이 높아 고소했고, 툭툭 끊겼다. 변씨는 면발만큼은 어떤 냉면집과 겨뤄도 자신 있다고 말한다. 면 레시피는 이렇다. 메밀 75~80%, 고구마 전분 20~25%, 그리고 물. 이게 다다. 처음 들이켠 국물 맛이 다소 짜게 느껴졌는데 면에 간을 안 해서란다. 국물이 두툼한 면발에 서서히 스미면서 간이 맞아간다.

 여의도 정인면옥은 갓 돌을 넘겼지만 변씨가 냉면을 뽑아온 내력은 꽤 오래됐다. 그의 부모는 평양 선교리 출신이다. 1972년 서울 오류동에 ‘평양냉면’을 열었고, 당시 열두 살이었던 변씨는 시장통에서 냉면을 배달했다. 98년 아버지가 작고한 뒤 형제들과 냉면집을 운영해오다 2011년 독립했다. 경기도 광명에 정인면옥을 연 뒤 지난해 여의도로 옮겼다. 정인면옥은 ‘평양냉면’의 맛을 계승하면서도 변화를 줬다. 국물에서 동치미를 뺐다. 동치미 맛이 일률적이지 않아서였다. 변씨 어머니도 냉면에 항상 동치미 국물을 넣은 건 아니었단다. 날씨와 기분에 따라 레시피가 달라졌다. 그가 평양냉면에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평양냉면 8000원. 02-2683-2615.


메밀 전혀 없는 함흥식 물냉면
육수는 동치미·양지국물 반반

경기 양평 서정

 

경기도 양평 용문산 관광단지를 가다 보면 길가에 ‘LA 갈비 서정’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2007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그냥 ‘서정’이었다. 이재관(58) 사장은 “원래 고기도 팔았는데 냉면집으로 더 유명해져서 지난해 가을부터 상호에 LA 갈비를 넣었다”며 웃었다. 고기를 판다고 해서 냉면 맛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은 ‘함흥식 물냉면’으로 유명한 집이어서 평양냉면에 익숙한 물냉면 매니어에게는 퇴짜를 맞을지도 모른다. 함흥식 물냉면은 메밀이 최소 50% 이상 들어간 면을 쓰는 평양냉면과는 다르다. 비빔냉면 면발에 넣는 고구마 전분을 사용한다. 단 1%의 메밀도 넣지 않는다.

 음식 칼럼니스트 김순경(75)씨는 “함흥냉면 하면 비빔냉면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며 “옛날 함흥에서도 전분면에 양지를 우려낸 물과 동치미 국물을 섞어 육수로 사용한 물냉면을 먹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함흥식 물냉면’ 또는 ‘육수냉면’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서울 가양동의 ‘이조면옥’이나 대치동 ‘반룡산’에 가면 이와 같은 육수냉면을 맛볼 수 있다.

 서정의 물냉면도 함흥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즉석에서 익반죽해 기계로 눌러낸 면에 배·오이·무채·계란을 얹어 양지(호주산) 삶은 물과 동치미 국물을 반반 섞은 육수로 말아낸다. 서울시내 평양냉면의 육수가 다소 밍밍하다면, 서정의 육수는 동치미 국물이 많이 들어가서 시원하고 깔끔하다는 평가다. 가격도 7000원으로 싸다. 간재미 회무침을 올리는 회냉면은 8000원. 031-775-1444.


가로수길 자리잡은 현대식 한식당
메밀·전분 8대 2 … 식감, 파스타 비슷

서울 신사동 개화옥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자리한 ‘개화옥’은 냉면을 여유롭게 맛볼 수 있는 모던 한식당이다. 도떼기시장같이 북적북적거리는 여느 냉면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방짜(놋그릇)에 냉면을 담아내 정성스러운 한 끼를 대접받는 듯하다. 그렇다고 개화옥이 외양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냉면 맛을 내기 위해 6년간의 개발 과정을 거쳤다. 2004년 서울 신사동에 개화옥 1호점을 열었는데 2010년 개화옥 가로수길점을 내고 나서야 비로소 냉면을 정식 메뉴로 올렸다. 개화옥 김학천(56) 대표는 “화학조미료를 단 1g도 넣지 않고 감칠맛을 내는 과정이 그만큼 어려웠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노력한 만큼 개화옥은 정통 평양식에 근접한 맛을 낸다고 자부한다. 평양냉면 명가 ‘우래옥’과 ‘장수원’에서 경력을 쌓은 오복만(2014년 작고) 면장(麵匠)에게 자문해 특유의 단맛이 나는 평양냉면을 만들었다. 육수를 낼 때는 80인분 기준으로 1등급 한우의 양지머리 6㎏, 사태 4㎏와 함께 파·마늘·생강·배·양파 등을 넣고 두 시간만 달인다. 그 이상 끓이면 고기의 단맛이 날아간단다.

 개화옥은 자가 면장이기도 하다. 주문이 들어가는 즉시 면을 뽑는다. 메밀은 분쇄기에 넣지 않고 맷돌로 간다. 메밀가루와 전분을 8대 2 비율로 섞어 반죽한 면의 식감이 파스타에 가깝다. 보통 밀가루 면이 겉은 부드럽고 심이 딱딱한데 반해 개화옥 면은 겉이 단단하고 속이 부드럽다. 차가운 국물과 함께 면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2000원을 더 내면 100% 메밀 면을 내준다. 1호점에서는 냉면을 판매하지 않고 가로수길점(2호점)에서만 냉면을 주문할 수 있다. 평양냉면 1만1000원. 02-3444-1459.

글=최승표·백종현·양보라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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