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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사랑한 ‘죄인’ 윤석화의 고백

중앙선데이 2015.06.20 16:20 432호 6면 지면보기
‘국민 배우’‘연극계 대모’…. 왕성히 활동하는 장년의 여배우를 가리키는 말은 많지만 왠지 이 사람에겐 좀더 특별한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다. ‘연극 여제’ 윤석화(59)가 무대로 돌아왔다. 2010년 ‘베니스의 상인’을 끝으로 배우보다는 제작자로 이름을 알렸던 그다. 영국으로 건너가 2013년 올리비에어워드 3관왕에 오른 뮤지컬 ‘톱햇’ 등을 공동제작하며 ‘웨스트엔드 첫 아시아 여성 프로듀서’란 타이틀을 얻었고, 지난 연말 제작과 연출을 겸한 연극 ‘나는 너다’는 연장 공연되며 대극장 연극 사상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연극 ‘먼 그대’로 5년 만에 컴백

그런데 ‘여제’의 컴백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작은 소극장에 홀로 섰다. 스승인 연출가 임영웅의 연극인생 60년 헌정작이자 본인의 연기인생 40년을 기념하는 ‘먼 그대’(18일~7월 5일 산울림소극장)다. 산울림소극장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렸던 ‘영영이별 영이별’(2005) 이후 10년만의 모노드라마다.

사실 그는 2년전 명동예술극장에서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연기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불미스런 구설수에 오르면서 극장측의 일방적인 취소로 공연이 무산됐었다. 그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배우로서 아픔을 겪었다. 산울림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서영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직접 각색·연출까지 도맡았다. 1988년 연극 ‘하나를 위한 이중주’를 통해 인연을 맺은 후 ‘목소리’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일곱 작품을 함께 하며 아버지같은 가르침을 준 임영웅에게 오롯이 헌정하기 위해서다.

비정상적으로 성실한 노처녀 문자가 유부남 한수를 사랑하며 구도의 길을 가는 이야기. 남자의 배신과 세상의 조롱에 직면해서도 사막에서 푸른 물길을 찾는 유목민처럼 고독하게 생명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문자다. 그런데 한수를 향한 문자의 우직한 사랑은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니다. 임영웅의 60년, 자신의 40년 동안 절대적인 대상이었던 관객에 대한 사랑을 은유한다. “누구와 비교할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염원이죠. 문자는 무엇 때문에 인내했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이 희망으로 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나 저나 연극, 관객을 사랑한 죄가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죄’겠죠. 문자를 통해서 위로 받고, 새로운 소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제’의 모노드라마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덩그런 무대 위 남루한 옷을 걸치고 독백을 하는 형식이지만,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콘트라베이스 선율과 왈츠라도 추는 듯 연기는 리드미컬했고, 볼거리도 버라이어티했다. “침묵과 무브먼트 등 기존에 볼 수 없던 이상한 작품이 될 것”이라던 그의 말대로 참신한 무대언어는 60분간 관객의 시선을 꽁꽁 붙들어 맸다.

고통을 침묵으로 감내하는 문자를 침묵으로 소개하는 프롤로그는 평범한 수화도 그를 거치면 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비수처럼 꽂히는 조롱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무브먼트’는 문자의 내면을 기막히게 그려낸 추상화 같았다. 사랑의 설렘에 들뜬 막춤 스텝은 너무도 인간적이라 웃음이 났고, 절망에 발버둥치다 ‘고통이여, 나를 찔러라’고 소리칠 땐 셰익스피어를 보는 듯 엄숙해졌다.

“나는 아무리 세찬 세상의 바람에도 고난이 축복이 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빛에 도달하고 싶은 자유의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갈기 펄럭입니다.” 에필로그 수화를 마치고 ‘멀어지는 신의 등불’을 향해 두 팔을 벌린 그의 얼굴엔 희열이 가득했다. 낮은 곳에 임할수록 희망은 커진다는 진리가 새삼 그의 얼굴에서 읽혔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산울림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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