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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빚은 예술 세계로의 초대

중앙선데이 2015.06.20 17:36 432호 30면 지면보기
옛 서울역사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문화역서울284’는 다루기 쉽지 않은 공간이다. 층고가 높은 근대 석조건물이 뿜어내는 블랙홀 같은 아우라는 웬만한 작품의 에너지 정도는 속절없이 빨아들인다. 하여 지금까지 이 건물과의 기싸움을 이겨낸 전시나 공연은 거의 없었다.

‘은밀하게 황홀하게-빛에 대한 31가지 체험’, 10일~7월 4일 문화역서울284

새로 예술감독이 된 신수진은 싸움 대신 악수를 택했다. 전시 작품은 공간에 맞서지 않고 동화된다. 그가 꺼내든 카드는 ‘빛’이다. 빛의 예술인 사진을 공부한 내공을 십분 살리고, 빛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을 구슬 꿰듯 적소에 배치했다. 마침 올해는 우리 민족이 빛을 되찾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중앙홀에 ‘HYBE’(한창민&유선웅)의 거대한 LCD작품 ‘빛을 발하다’가 관람객을 맞는다. 영상 속 커다란 눈이 당신은 누군지, 여긴 어딘지 묻는 듯하다. 이때 동선을 따라 왼쪽으로 바로 이동하지 말고 자신이 들어온 정문을 되돌아보길. 간유리 너머 환하게만 비쳐보이는 바깥 세상이 갑자기 묘하게 낯설다.

사진으로 느껴보는 ‘주명덕 블랙’과 ‘민병헌 하늘’ 공간을 지나면 올리버 그림의 ‘시티 챕터’가 설치된 암흑의 공간이 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빙 라이트가 작가의 시선처럼 어두운 천장과 벽에 도시의 흔적을 잠깐씩 남기는 곳이다. 서울역 귀빈실에 설치된 이상진의 ‘라이팅 토크’는 주체하지 못하는 기운이 넘치는 작품. LED 등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육면체 공간에서 빛은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빠져나갈 곳을 찾아 맴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무심히 넘겨서는 안 된다. 걸려있는 전등 가리개도 작품이다. 뮌(김민선·최문선)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가리개 칸마다 작은 사람들이 보인다. 빛을 경배하듯 여기저기 모여있다. 그 그림자가 주변에 어스름 깔려있다.

2층 메인홀을 주도하는 작품은 STENOP.ES(Romain Alary & Antoine Levi)의 ‘카메라 옵스큐라 무비’다. 파리와 인도 어딘가를 찍은 영상이 건물 벽면에 아름다운 피아노 음악과 함께 고스란히 투사된다. 스크린이 아닌 투박하고 층이 진 건물 벽이 오히려 영상과 잘 어울린다. 빛이 서울역을 어루만지는 듯 안온한 느낌을 준다.

만 레이, 라즐로 모흘리 나기 등 저명 사진작가가 빛과 그림자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다가 맨 끝방으로 들어가면 베른트 할프헤르의 설치작이 기다리고 있다. 각국 도시를 찍은 사진을 모아 구(球)를 만들어놓았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이 된지라 아무리 보아도 신기했다.

빛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작품인 EVERYWARE의 ‘포털’과 ‘젖다’에서 잠깐 놀다가 코너를 돌면 이창원의 ‘면벽’이 나온다. 얼핏 스테인드글라스 같지만 가까이 가면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다.

깜깜한 밤에 달빛과 별빛으로만 사진을 찍는 장태원 작가, 일반적인 사진과 야광 안료 그림을 오가며 보여주는 뮌의 ‘세트’를 지나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 조덕현의 작품이 사진인 듯 홀로그램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설치돼 있다. 하지훈의 ‘자리’에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이이남의 영상 작품이 대미를 장식한다. 빛 속에서 한바탕 유영을 한 느낌이다.

신수진 감독은 “사진 발명 이후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게 된 빛으로 만드는 그림과 빛에 대한 해석, 빛을 통해 바라본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보았다”며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체험을 해보시라”고 권한다.

전시와 어울리는 공연 프로그램도 ‘불꽃의 놀이’라는 제목으로 마련됐다. ‘이야기를 찾아서’(24일 오후 8시·극악무도), ‘주다 그리고 받다’(27일 오후 5시·김혜경), ‘텅빈 순간들’(7월 3일 오후 8시, 4일 오후 2시·5시·Very Theatre 조동옌)이 남아있다. 문의 02-3407-3500. 무료.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문화역서울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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