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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줏대없는 잣대

중앙선데이 2015.06.20 17:48 432호 34면 지면보기
만일 모처럼 가족이 외식을 한다고 해보자. 그 식탁에 앉은 사람은 남편과 아내와 아들 셋이지만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식사자리에 온다. 휴대전화기를 통해.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은 말이 없다. 왜냐하면 선배와 친구와 후배와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문자 메시지로, 카톡으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아들은 식사 내내 휴대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 모습을 남편이 노려본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못마땅한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일까. 남편은 아들에게 말한다. 밥 먹을 때는 전화기 좀 내려놓지. 못마땅한 아들은 전화기를 의자에 내려놓는다. 여전히 한 손으로 잡은 채.

애매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아내가 이야기를 꺼낸다. 얼마 전에 노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중간에 전화가 와도 받지 않더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전화기가 진동을 하는데도. 내가 받으라고 해도 받지 않고 어디서 오는 건지 확인하지도 않고 조용히 전화기를 엎어두는데 원래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참 근사해 보이더라. 전화기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이 살짝 떨리는 것 같더라.

아내가 이야기 하는 도중에도 아들은 손에서 휴대전화기를 놓지 않는다. 휴대전화기는 질투심 많은 애인 같아서 한시도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할 때 누군가 아들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잠깐만요” 하고 아들은 일어서 바깥으로 나간다. 아들의 잠깐은 길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들의 사정을 설명한다. 아들은 요즘 졸업작품집을 준비 중인데 막바지 작업 때문에 친구와 선후배들과 연락할 일이 많다. 리뷰도 받아야 하고 편집에 대한 의견도 계속 주고 받는 것 같다.

남편은 아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점점 이해심이 없어지는 것일까. 남편은 아내에게 짜증을 부린다. 그런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식사를 마치고 얼마든지 통화해도 되지 않는가. 상대방에게 지금 식사 중이니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양해를 구하면 된다. 함께 식사하려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아들이 돌아오고 식사를 하려고 수저를 들 때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직장 동료다. “잠깐만” 하고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것 같다. 아내와 아들은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남편은 눈짓으로 먼저 먹으라고 했으나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전화를 중간에 끊기 곤란한 남편의 사정은 모르고 말이다.

남편의 잠깐도 길다. 남편이 통화하는 동안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부지런히 식어간다. 딱히 아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남편을 변호한다. 원래 회사 일이라는 게 좀 그렇지 않느냐. 진행하기로 한 일이 갑자기 중단될 수도 있고 또 예정에 없던 일을 급히 해야 할 때도 있고. 아들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내 역시 빨리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점점 혼잣말이 많아지는 것일까. 이제 아내는 아들에게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설득하는 중이다.

“타인에겐 관대하게 자신에겐 엄격하게”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거꾸로다. 사람은 원래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너그럽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의 사정은 잘 모른다. 그건 노력해야 겨우 알 수 있다. 의식적으로 감정이입도 하고, 내재적 접근도 하고, 역지사지도 하고, 상상력도 동원하고 그렇게 부단히 노력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또 한번 안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금세 잊어버린다. 매번 매 순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말이 있다고 하지. 그건 공부를 많이 한 스님들에겐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같은 사람에겐 ‘점오점수’다. 끝없이 깨닫고 끝없이 닦아야 한다.

남편이 돌아오고 다 식은 음식이지만 드디어 먹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아내의 휴대전화기가 울린다. 세미나 동료다. “잠깐만” 하고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들이 한마디 한다. 엄마에게도 사정이 있겠죠.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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