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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지우거나 되살려 트라우마·치매 치료

중앙선데이 2015.06.20 18:17 432호 2면 지면보기
조작된 기억을 사고파는 건 과학소설(SF)의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타인의 꿈에 들어가 왜곡된 기억을 심고(영화 ‘인셉션’), 평소 꿈꾸던 판타지를 기억에 주입시켜 실제처럼 느끼게 해주는 세상(영화 ‘토탈리콜’)은 윤리적 잣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억을 조작하는 건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장난치는 것과 마찬가지”(뉴욕대 의료윤리학 카플란 교수)란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전쟁·고문·강간 같은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고, 치매로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는 환자에게 기억을 제어하는 과학기술은 ‘신경재활’이라는 또 다른 치료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메모리 임플란트’ 개발되면

 그중 초소형 컴퓨터를 뇌에 이식해 기억을 제어하는 ‘메모리 임플란트’를 예로 들어 본다. 핵심 기술은 컴퓨터 칩이 뇌 작동 원리를 모방하는 뉴로모픽(neuromorphic) 칩이다. 고려대 뇌공학과 곽지현 교수는 “인간 뇌가 수십억 개의 뉴런과 수조 개의 시냅스를 통해 시각·청각 같은 감각 정보에 반응하고 이를 병렬 처리하는 방식을 실리콘에 구현하려는 것이 뉴로모픽 칩”이라고 말했다. 뇌의 뉴런은 이미지·소리에 자극받아 끊임없이 연결 방식을 변화하는데 이는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뉴로모픽 칩 역시 뇌가 데이터를 처리·학습하는 과정을 따라 한다.

초소형 컴퓨터 칩을 뇌에 이식
메모리 임플란트는 사람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 회로에 뉴로모픽 칩을 이식해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기존 기억을 삭제한다. 곽 교수는 “해마는 세 가지 신경세포층으로 구성된 비교적 간단한 신경회로”라며 “모든 감각신경 정보는 해마를 거쳐 저장·출력되므로 해마의 구조와 전기신호를 연구하면 장기 기억 저장의 기전을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던캘리포니아대 시에도르 버거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향후 10년 안에 인간의 두뇌에 메모리칩을 이식하는 것이 상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구진은 뇌가 기억을 형성·유지하는 과정을 응용해 메시지를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메모리칩을 만들었다. 쥐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했는데, 메모리칩에서 발생한 전기신호로 기억의 일부를 되살릴 수 있었다. 현재는 메모리 임플란트 칩을 정교화해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변환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원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할 것이란 계획도 밝혔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뇌공학과 신경계산연구실에서 기억의 중추인 해마의 전기신호·신경회로 특성을 컴퓨터에 모사하는 ‘뉴로모픽 기억 저장 해마 모델’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곽 교수는 “해마의 다양한 기억 저장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해 전기신호를 측정·해독하고, 시냅스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전을 실험 중”이라고 말했다. 인공 해마 모델이 정교화되면 인공 해마에서 생성되는 신경 전기신호를 손상된 해마에 전달함으로써 기억을 이식할 수 있다. 곽 교수는 “메모리 임플란트 기술이 정확히 실현되려면 메모리 입·출력 과정에서 신경세포들이 사용하는 신경 암호(Neural Code), 즉 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며 “메모리 임플란트 기술 개발이 성공하면 신경 재활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첨단 컴퓨터는 무게·두께를 줄이는 크기 경쟁에서 점차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미시간대 연구팀은 지난해 한 숟가락 분량의 디지털 콜로이드 물질에 약 1테라바이트(TB·약 1000GB)의 정보를 담는 액체 컴퓨팅(wet computing) 기술을 내놨다. 이 물질을 뇌에 이식하면 데이터가 하드디스크에 저장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정보를 뇌에 기억시킬 수 있다.

 컴퓨터에 뇌의 형태를 담아내려는 또 다른 시도는 IBM의 ‘레독스 플로’다. 사람의 혈액처럼 음이온·양이온이 있는 전해질 액체가 컴퓨터 내부를 돌아다니며 전력을 공급하고 열을 식혀 주는 시스템이다. 이는 체내의 신경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체내에서는 전해질의 농도 차에 의해 전하가 발생한다. 전하가 이동하면서 신경세포를 자극하면 전기신호가 방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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