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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서 산화한 이근석, 이국땅서 자유 지킨 마틴 … 그들이 대한민국의 힘

중앙선데이 2015.06.21 00:42 432호 10면 지면보기
1 6·25전쟁 직전 우리 공군 조종사 10명은 일본 규슈에서 무스탕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았다. 이근석 편대장은 뒷줄 오른쪽 끝. 2 로버트 마틴 대령. 3 강원도 철원군 백골공원에는 백골부대를 상징하는 백골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여러분의 임무는 변함없이 확고하며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의 승리다.”

6·25전쟁의 숨은 영웅들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62년 5월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 한 연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이 말을 통해 군인의 길을 명확히 제시했다. 6·25전쟁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며 군인의 길을 실천한 영웅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개전 초기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에도 맨손으로 적과 맞선 용맹한 군인과 의용군들의 명예로운 희생이 있었기에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조국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불사른 6·25전쟁의 숨은 영웅들을 조명해봤다.

◆이근석 편대장(1917.1.17~1950.7.4)
“3번기는 도로 좌방 탄약 차량을 공격한다. 그리고 건투를 빈다.” 50년 7월 4일 경기도 평택 인근 상공.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F-51D(무스탕) 전투기를 몰고 출격한 이근석 준장(당시 대령)이 내린 마지막 명령이다. 편대장이었던 그는 최후의 명령 직후 적군의 탄약 차량을 향해 돌진했다. 이미 적의 대공포 공격으로 전투기 엔진에 불이 붙어 더 이상 조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 대신 마지막 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이 장군은 이렇게 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전사했다.

 48년 4월 공군 창설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이 장군은 50년 5월 공군비행단장에 취임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은 조종 실력이 우수한 조종사 10명을 일본의 미군 공군기지로 보냈다. 무스탕 전투기 조종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이 장군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교육 도중 그는 조국의 전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훈련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루빨리 귀국해 출격하겠다”고 미 공군에 요청했다. 그는 그해 7월 2일 미군으로부터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제공받아 동료와 함께 대구 동촌기지(K-2)로 돌아왔다. 이튿날 바로 첫 출격했다. 이 장군을 편대장으로 한 4명의 조종사가 동해안의 묵호·삼척 등에 상륙한 북한군을 공격해 전과를 올렸다. 수도권에서도 적 탱크 2대와 차량 3대를 파괴했다. 7월 4일 적 탱크 20여 대와 5000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격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그는 장렬히 전사했다. 이듬해 9월 그는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현재 그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로버트 마틴 대령(1902.4.15~1950.7.8)
50년 7월 7일 로버트 마틴 대령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4사단 34연대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밀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천안역을 중심으로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적의 공세는 거셌다. 북한군이 후방에 침투해 통신선마저 끊어버리자 연대는 완전히 고립됐다. 자정 직전엔 방어선이 뚫리면서 북한군이 천안 시내로 밀려들어 왔다. 밤새 치열한 시가전이 계속됐다. 하지만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수류탄과 2.36인치 로켓포만으로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적에게 뚫려 후퇴하느냐, 아니면 연대 전체가 몰살을 하더라도 방어선을 사수하느냐를 놓고 연대장인 마틴 대령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는 결국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다음 날 오전 8시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연결되는 국도에서 마틴 대령은 직접 2.36인치 로켓포를 들고 적 T34 전차와 맞섰다. 이미 불리해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만큼 부하들의 사기를 독려하기 위해선 솔선수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군 전차를 겨냥한 그의 로켓포가 불을 뿜자마자 적 전차도 85㎜ 포를 발사했다. 마틴 대령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틴 대령의 전사는 미군 지휘관의 첫 희생이었다. 천안지구 전투에서 마틴 대령과 미군 128명이 전사했다. 168명은 적의 포로가 됐다. 일본에서 긴급 호출돼 한국으로 파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그는 산화했다. 천안시는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구성동에 ‘마틴공원’을 조성했다. 충절오거리에서 도리티 고개까지 이르는 3.2㎞를 ‘마틴거리’로 명명했다. 매년 천안에서는 그를 추도하는 행사가 열린다.

◆진백골 부대
50년 11월 30일 함경북도 부령전투에서는 이원계 소령이 이끄는 진백골 18연대 6중대 소속 160여 명이 북한군과 맞섰다. 당시 이 부대는 후퇴하는 국군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과 용감하게 맞섰던 부대원들에게 부령전투는 마지막 임무가 됐다. 최후의 1인까지 남아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고 부대원 전원이 전사했다. 부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는 부령전투 직전에 부상을 당해 참전하지 못했던 최수용씨(2011년 작고)뿐이었다.

 해방 이후 48년 북한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단원들을 주축으로 창설된 이 부대는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끝까지 조국을 지키고, 북녘 땅을 되찾겠다’는 각오로 철모 양쪽에 백골을 그려 넣고 전투에 참가해 진백골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부대의 용맹은 6·25전쟁 발발 전부터 널리 알려졌다. 49년 8월 옹진전투에 참전해 북한군 3여단을 공격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한강방어 전투에서 북한군 1000여 명을 사살하며 적의 남하를 막았다. 50년 8월에는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던 기계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적 1250명을 사살했다. 이후 최선봉 부대로 원산·함흥·청진 등을 거쳐 부령까지 진격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최씨는 83년부터 집에서 전우들의 제사를 지냈고 6중대 추모관도 건립하는 등 진백골 부대의 무공을 알리기에 앞장섰다. 제3보병사단은 62년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골부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반공 오열사
반공 오열사는 당시 충남 서천의 장항농업중학교 졸업반 학생이었던 김달식·양태순·임상덕·신윤식·최승상군 등 5명을 일컫는 말이다. 개전 초기 북한군이 충남 서천까지 밀고 들어오자 이들은 결사동지회를 결성했다. 50년 8월 13일 적의 정보를 서천 앞바다 연도에 있던 우리 군함에 전달해 장항제련소(현 LG금속 장항공장) 뒷산과 비인면 월명산에 있던 적을 함포 사격으로 격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서천군 만능천에서 신호탄을 올려 적 진지의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우리 공군의 공습에도 도움을 줬다. 이들은 9월 3일 우리 해군과 연락하기 위해 배를 타려다 선원의 밀고로 체포됐다. 이후 모진 고문 끝에 9월 9일 대전형무소에서 순결했다. 추모행사는 매년 충남 서천군에 위치한 반공 오열사 묘역에서 열리고 있다.


엄상용 육군 소령(육사 5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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