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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병으로 탱크 막은 특공대, 포탄 나른 시민들 … 온몸으로 ‘화력 10배’ 적군 저지

중앙일보 2015.06.20 15:30

올해로 6·25전쟁 65주년을 맞는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전차(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왔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중동부 전선의 거점인 춘천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막강한 화력에도 국군 6사단의 저항으로 남하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개전 초기 북한군이 3일 동안 춘천에서 발이 묶인 덕에 우리 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미군은 한반도 파병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춘천지구 전투에 참전했던 노병들에게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화염병으로 적 탱크 파괴…生死 생각할 겨를도 없어
로켓포와 소총으론 적 저지 역부족
춘천 뚫리면 끝장이란 각오로 전투
시민들도 포탄 옮기며 사수에 동참

6·25전쟁 직후 벌어진 춘천전투에 참가했던 노병들이 옛 전장에 다시 모였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 앞에서 이정상(87)·김용철(85)·김상업(87)·김상혁옹(83·왼쪽부터)이 65년 전 전투를 회상하며 조국 수호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김춘식 기자
“춘천이 뚫리면 대한민국이 뚫린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춘천을 사수하라.”



 50년 6월 25일 김종오 사단장(당시 대령)은 자신이 지휘하는 6사단의 예하 부대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38선을 넘어선 북한 1군단은 이미 서울을 위협하고 있었다. 춘천 방어선마저 붕괴되면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 전체가 바로 적의 수중에 넘어갈 위기였다. 북한군의 공세는 거셌다. 한 달 안에 남한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속도전을 펼쳤다. 북한 2군단은 춘천~홍천~이천을 따라 남진해 28일에는 수원까지 함락할 계획이었다. 강원도로 남하한 2군단이 우회해 1군단과 연결될 경우 서울과 수도권 남부는 물론 충청 등 그 이남 지역까지 적의 수중에 바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6사단의 임무는 최대한 적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김 사단장의 춘천 사수 의지는 결연했다. 이미 서부전선이 붕괴된 마당에 중동부 전선까지 무너지면 전세는 회복 불가능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격의 여지도 없이 남한 전체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용철(85·당시 하사)옹은 6사단 19연대 2대대 6중대 소속이었다. “원래 우리 연대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6월 25일 오후 6시에 갑자기 춘천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기차를 타고 춘천에 도착하니 26일 새벽이었다. 우리 2대대는 춘천 모진교에서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은 당초 춘천 38교를 통해 남하할 계획이었지만 탱크가 넘어오기에는 다리가 약했다. 아군도 이미 38교에 배치돼 있었다. 이에 따라 6사단 지휘부는 북한군 탱크가 모진교를 우회로로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처럼 개전 초기 춘천의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진격하고 있었지만 이를 저지할 만한 무기가 우리 국군에겐 없었다.



목숨 건 특공대에 너도나도 자원

김옹은 모진교에서 적과의 대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연대에는 57㎜짜리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기로는 적 탱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남하하는 적 탱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따라서 직접 적 탱크에 접근해 파괴할 특공대를 조직했다. 너도나도 특공대에 자원했다. 휘발유를 담은 화염병을 사용했다. 연대장인 민병관 중령의 지휘로 나를 포함한 특공대가 화염병을 적 탱크 엔진 바로 밑에 투척했다. 엔진이 과열되고 화재가 발생하자 적군이 탱크 해치를 열었다. 이때를 기다려 탱크 안에 수류탄을 까서 넣었다. 이렇게 탱크 두 대를 잡았다.”



 우리 군은 화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탱크가 밀려오면 특공대가 이를 파괴하는 공방이 지속됐다. 김 사단장은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죽기를 각오하라”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2연대 1대대 4중대 박격포중대에 소속됐던 김상업(87)옹은 전투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탱크는 81㎜ 박격포에도 끄떡없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우리 무기는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M1과 카빈 소총, 수류탄, 박격포 등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방어선을 구축한 말고개를 적 탱크가 통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연대장인 함병선 대령이 ‘다른 무기는 소용이 없다. 전차에 접근해 직접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특공대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연대와 같은 방법으로 적 전차 6대를 파괴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당시 군사고문단으로 북한에 들어왔던 소련군 한 명을 생포했던 것이다. 이 포로는 후방으로 보냈다. 이후 그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화력 측면에서 절대적 열세에도 6사단이 춘천에서 3일 동안 북한군 남하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참전용사들의 용맹 덕분만은 아니다. 적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있던 6사단의 대비태세가 큰 몫을 했다.



귀순병이 북 동향 전달 … 방어선 재정비

전쟁 발발 6일 전인 6월 19일. 38선 경계를 맡고 있는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김 사단장에게 긴급 보고를 한다. 임 중령은 “우리 6사단과 대치하고 이는 북한군 2군단 2사단 소속의 병사가 귀순해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귀순병이 ‘훈련을 위해 일주일간 야간 행군을 통해 전차 40대와 함께 화천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해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마침 김 사단장은 북한군의 도발이 5월 이후 갑자기 중단된 것이 궁금하던 차였다. 6월 들어 북한군은 포 진지 구축에만 열중했고 북한군 장교들이 지도를 들고 남쪽을 보고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 등이 관측돼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김 사단장은 이를 북한군의 공격 임박으로 판단했다. 6사단은 전쟁 전에 이미 주요 도로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진지를 정비했다. 북한군의 공격이 화천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감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따라 사단 내 유일한 포병화력인 제16야전포병대대도 춘천에 배치했다.



 당시 춘천 등 중동부전선을 맡고 있던 6사단은 북한군 2군단 산하 2사단, 12사단, 603 모터사이클연대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병력은 아군의 4배, 화력은 10배 이상 우세했다. 하지만 6사단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방어선을 계획대로 뚫지 못했다. 춘천 사수에는 춘천 시민의 역할도 컸다.



후퇴 명령에 울분 삼키며 철수

김상혁(83·당시 2연대 3대대 11중대 소속 하사)옹은 이렇게 기억했다. “소양강 북쪽에 있던 포탄 5000여 발을 시민들이 강 남쪽으로 안전하게 옮겼다. 일반 시민뿐 아니라 학생과 공장에 다니는 젊은 여성들도 동참했다. 춘천 전체가 북한군의 남진을 막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이런 군·민의 단결은 전쟁의 두려움을 덜어줬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나선 군인들은 생사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전우가 적의 포탄과 총탄에 쓰러지면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는 각오로 싸웠다.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정상(87·당시 19연대 1대대 1중대 소속 하사)옹은 “50년 5월 20일 6사단에 배치돼 원주로 이동했다. 현지 지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투에 투입됐다. 48년 여순사건을 진압했던 경험이 실제 전투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 나중에 후퇴 명령을 받았을 때는 울분을 삼켰다. 충분히 더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춘천 전투에서 싸웠던 참전용사 중 이제 생존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이들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우리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도 춘천 전투는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춘천=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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