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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북한산 날다람쥐, 도봉산 왕언니

중앙일보 2015.06.20 00:07 종합 25면 지면보기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지난주 산에서도 화제는 온통 메르스였다. 같이 간 산 친구들이 우리 중에 낙타와 접촉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언제 마지막으로 낙타를 탔느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음, 언젠가? 재작년 서아프리카 모리타니아 파견 근무 때였나? 그때 몇 날 며칠 낙타를 만지고 낙타 젖도 많이 마셨는데 그게 이번 메르스랑은 아무 상관없겠지?”



 짐짓 걱정하는 척했더니 ‘만물박사’ 친구가 단호하게 말한다.



 “면역성이 높으면 어떤 전염병도 안 걸려. 면역성은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에서 나오는 거니까 등산이 최고 중의 최고야.”



 그러니 우리는 80대까지 열심히 산에 다니자고 등산 컵에 약수를 담아 건배하며 굳게 결의했다. 좋았어. 그렇게 살자고! 예전 같으면 내 무릎이 그때까지 버텨줄까, 의심했겠지만 얼마 전 두 분의 산쟁이 할머니를 만난 후부터는 무릎 타령, 나이 타령이 쏙 들어갔다.



 한 분은 올겨울, 귀가 떨어질 만큼 추운 날 북한산 의상봉 능선에서 만났다. 바위가 전날 온 눈으로 살짝 덮여 있어서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데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휙 지나갔다. 몸에 딱 붙는 암벽등반용 검은색 옷을 입고 바위 길을 날다람쥐처럼 달려가는 뒷모습이 산악훈련 중인 30대 같았다. 얼마 후, 높은 바위 위에서 그 ‘날다람쥐’를 만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분은 30대가 아니라 무려 77세, 내가 산에서 만난 최고령 할머니였다. 젊었을 때 예쁘다는 소리 수없이 들었을 이 할머니, 군살 하나 없는 온몸에서는 에너지가, 두 눈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이 할머니, 신혼 초부터 허구한 날 산에 가는 남편 때문에 60세까지는 등산은커녕 산 자체를 싫어했단다. 그 남편이 죽고 우울증이 겹쳐 같이 사는 젊은 며느리만 들들 볶으며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띈 남편 등산 스틱을 가지고 앞산에 오르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단다. 그때부터 25년째 이틀에 한 번, 한 번에 너덧 시간씩 북한산에 다니는데 그러다 보니 며느리 구박할 시간도, 아플 시간도 없고 체력과 기분이 좋아져서 살맛이 난다고 한다.



 “산 아니었으면 난 벌써 죽었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주위 사람을 들들 볶으면서 말이에요.” 오후 약속이 있다며 뛰듯이 바위 길을 내려가는 ‘북한산 날다람쥐’의 날렵한 걸음걸이와 30대 뺨치는 명품 몸매를 보며 적어도 앞으로 10년간은 이분을 계속 만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분보다 더한 강적을 만났다. 1934년생이니 무려 82세 할머니다. 같이 등산하자고 했을 때는 산세 험한 속리산 줄기를 어떻게 간다는 거지, 반신반의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80대 산쟁이를 ‘구경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할머니를 처음 본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담하고 다부진 몸집에 반바지 밑으로 나온 종아리가 축구선수처럼 굵고 단단했다. 곧은 허리, 또랑또랑한 목소리, 밝은 표정이 80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산행이 시작되니 더욱 그랬다. “나는 빨리는 못 가요”라더니 8시간 내내 선두에서 로프 잡고 오르는 바위 길과 50대인 나도 무릎이 후들거릴 만큼 가파른 내리막길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다니셨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 하루 종일 옆에 딱 달라붙어 질문을 퍼부었다.



 알고 보니 일행들이 ‘도봉산 왕언니’라고 부르는 할머니에게 이 정도의 산행은 산책 수준. 1년에도 수차례 설악산과 지리산 능선 종주를 하고 전국 산에서 텐트 야영, 비바크 야영, 암벽등반까지 하는데, 재작년 팔순잔치를 인수봉 정상에서 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런 체력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활짝 웃으며 “이 굵은 허벅지에서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하신다. 이 할머니, 정작 젊었을 때는 10m만 걸어도 주저앉아 쉬어야 할 만큼 몸이 약했단다. 40세가 되던 해, 요양 삼아 설악산 오색약수터 민박집에 묵으며 그 근처를 살살 걸어 다니다 등산만이 살길이란 걸 깨달았단다. 그 후 도봉산 앞으로 이사, 40년간 산을 직장이라 여기며 크고 작은 산을 가리지 않고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단다. 혼자만 다니는 게 아니라, ‘지리산 종주를 하고는 싶어도 내 체력으로 될까?’라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부추겨 앞장서는 데 선수란다. 모두들 80대 할머니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라는 마음이 절로 드는 걸 거다.



 8시간 산행을 마치고도 지친 기색 전혀 없이 “오늘, 참 재미있었죠? 우리 또 같이 등산해요”라고 다정하게 말하는 산쟁이 할머니를 보면서 뜨끔했다. 요즘 들어 또래 산 친구들과 산에 다닐 수 있는 날이 길어봐야 15년 안팎일 거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민망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어디다 대고 나이 타령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젊디젊은’ 나는 이번 주말, 학기 말 과제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어도 산에 갈 거다. 면역성을 높이기 위해, 허벅지 근육 사수를 위해. 야호!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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