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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혁명도 예술도 다정다감한 기질 없으면 못 해” … 예그린악단 창단 ‘살짜기 옵서예’가 탄생했다

중앙일보 2015.06.15 02:13 종합 12면 지면보기
육군 중령 시절이던 1959년 김종필(JP) 전 총리가 당시 청파동 자택에서 누운 자세로 딸 예리(8)와 함께 아코디언 연주를 즐기고 있다. JP는 베이스버튼을, 예리는 건반을 누르고 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분주하던 1961년 12월 나는 관현악단 40명, 합창단 35명으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종합음악예술단체인 ‘예그린악단’을 만들었다. 나라를 재건(再建)하는 데 정치·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신문화의 정수(精髓)인 문화예술이 뒷받침돼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까닭도 종국엔 그 바탕 위에서 학문과 과학기술을 진흥시키고 예술의 꽃을 피워 국민 삶의 질을 풍요하게 하려는 데 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5> 음악, 그리고 정치
JP “민족예술 국제화” 문화적 야망
관현악 40명, 합창 35명 악단 만들어
‘살짜기…’는 고전 배비장전이 모태
28세 패티김이 주인공 … 2만명 관람



 1951~52년 6개월간 미국 보병학교 유학 시절의 경험도 예그린 창단을 자극했다. 뉴욕 록펠러센터의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봤던 악단의 모습은 아주 화려했다. 당시 조국 강토는 전쟁의 포연(砲煙)으로 뒤덮였지만 ‘우리도 언젠가 이런 거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나라도 45년에 ‘고려심포니’란 것이 만들어져 임원식(1919~2002)씨 지휘로 정기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나는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하나 만들어 우리나라 전통 악기와 합주해 보자는 구상을 했다. 예그린이란 이름도 내가 그런 의미를 담아 지었다.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미래를 열어 가자’는 뜻이다. 전통 민요를 현대화하고 한국의 민족예술을 국제화해 보겠다는 문화적 야망이 들어 있었다. 악단 지휘는 해군 정훈음악대장 김생려(1912∼1995)씨가 맡았다. 창작뮤지컬·사물놀이와 협연, 혼성 합창단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어느 대학교수가 논문에서 ‘예그린악단은 북한 피바다가극단의 대형 가무극에 대적할 음악극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 모양인데 잘못된 해석이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왜들 아무런 근거 없이 그렇게 가져다 뜯어 붙이는지 모를 일이다.







 62년 1월 30일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열린 창립공연 ‘삼천만의 향연(饗宴)’은 한국 뮤지컬의 효시였다. 예그린합창단과 무용단, 관현악단이 총출동해 우리의 고전과 민속, 흘러간 유행가 등 32곡을 드라마틱하게 엮었다. 이후에도 ‘봄잔치’ ‘여름밤의 꿈’ 등 가무극 공연이 이어졌다.



1966년 예그린악단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초연 당시 주인공 패티김(왼쪽)과 곽규석. [중앙포토]
 남들은 종종 나를 ‘다재다능(多才多能)하다’고 과찬을 넣어 표현한다.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 음악·미술을 두루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의문의 표시다. 원래 어릴 적부터 미술과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설명하자면 혁명가와 예술가의 기질은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걸 다재다능을 넘어 ‘다정다감(多情多感)’한 기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정치에도 예술에도 다정다감한 흐름이 필요하다. 각박한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다정다감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특이한 발상도 나올 수 없다. 창조적인 행동도 인간의 따뜻함이나 풍부한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게 없으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할 수 없다.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의 3인방 로베스피에르·당통·마라는 모두 혁명 중에 죽었지만 다들 음악깨나 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시 예그린으로 돌아가면 악단은 나의 정치적 부침(浮沈)과 운명을 같이했다. 63년 내가 1차 외유를 떠나고 악단을 봐 주는 사람이 없어지니 슬슬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다 2차 외유를 지나 민주공화당 의장에 복귀한 이듬해인 66년 4월에 재창단됐다. 내가 후원회장을 맡고 일제 말기 가극운동에 참여했던 박용구(현재 101세)씨가 단장으로 모든 운영을 주관했다. 음악과 무용·관현악단을 합해 단원이 150여 명에 달했다. 그때 탄생한 작품이 한국 창작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살짜기 옵서예’이다. 우리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모태로 한 이 뮤지컬의 여주인공 기생 애랑 역은 28세의 인기 가수 패티김이 맡았다. 살짜기 옵서예는 제작비 300만원, 출연자 300명이라는 한국 무대사상 최대 기록을 당시에 세웠다. 나흘간 총 1만6000여 명이 시민회관에서 관람하는 전례 없는 기록도 세웠다. 68년 내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공화당을 떠나면서 예그린은 다시 해체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 명맥은 국립가무단·시립가무단으로 이어졌다.



 시민회관이 화재로 불에 탄 뒤 78년 새로 준공한 세종문화회관에 파이프오르간을 장치한 건 나의 오래된 자부심이다. 국무총리였던 나는 건축 도중 설계 변경을 지시해 파이프오르간을 설치케 했다. 그때 돈으로 피아노 1700여 대 값과 맞먹는 6억1300만원을 들여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장착했다. 6단 건반에 8098본(本)의 파이프뿐 아니라 32개 우리 고유 범종과 프랑스식 종 40개를 첨가해 한국의 은은한 선율과 멋을 표현하도록 했다.



지난 13일 JP가 신당동 자택에서 애장품인 이탈리아산 수제(手製) 만돌린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김춘식 기자],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일국의 수도를 대표하는 공연장에 그런 파이프오르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 이전까지 일본 NHK방송국의 파이프오르간이 동양 최대였다.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느라 욕도 꽤나 먹었다. 소위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화려하다며 신문에 비판 칼럼을 써댔다. ‘동양 최대’를 빼앗긴 일본 언론들도 시기·질투를 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오르간은 바로크 시대의 종교음악이나 연주하는 유령과 같다’고 혹평했다. 이런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으니 일종의 ‘음악의 경부고속도로’를 깔았다고나 할까.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의 진가는 곧 드러났다. 78년 5월 영국의 에드워드 히스(1916~2005) 전 총리가 방한했을 때 나는 그를 세종문화회관으로 데리고 갔다. 히스 총리가 파이프오르간을 잘 친다는 얘기를 일찍이 들은 터였다. 그는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란 말에 반색하며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는 멘델스존의 ‘소나타 2번 작품 65’ 등을 45분 동안이나 연주했다. 세종문화회관의 음향시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997년 9월 자민련 총재인 JP가 SBS-TV 특별 생방송 ‘대통령 후보와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수 노사연의 ‘만남’에 맞춰 아코디언 반주를 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나의 음악 사랑은 청소년 때 싹텄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공주중학교(5년제) 시절 후지타(藤田)라는 음악선생이 기숙사 사감을 겸했다. 그는 강당에 개인 피아노를 가져다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연주를 했다. 그는 날 퍽 귀여워해 줬는데 그에게서 피아노의 기초를 익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만돌린(8줄짜리 현악기)도 공주중 1학년 때 4학년 선배에게서 배웠다. 그 선배는 어디서 배웠는지 만돌린을 기가 막히게 잘 연주했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 시절 달밤에 선배가 연주하던 만돌린 소리는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아코디언도 내가 즐겨 연주하던 악기 중 하나다. 딸 예리의 국민학생 시절, 내가 누운 채 아코디언의 바람을 집어넣고 왼쪽 베이스 버튼을 짚으면 예리가 오른쪽 건반을 연주하곤 했다. 공화당 의장 때인 67년 7월 당 재정위원장을 맡은 김성곤 의원의 금성방직 안양공장 잔디밭에서 열린 공화당 단합대회에서 100여 명의 의원 앞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가수 이미자씨가 ‘섬마을 선생님’을 부르고 내가 아코디언으로 반주를 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자’ 하니 노사연도 생각난다. 자민련 총재 시절인 97년 9월 SBS 생방송 ‘대통령 후보와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수 노사연이 ‘만남’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급조한 ‘JP와 그 악단’과 함께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음악을 좋아했다. 박 대통령은 사범학교(대구사범)를 나와 풍금을 잘 쳤다. 내가 만돌린이나 오르간 같은 악기를 다루는 것을 보면 “나도 해 볼까” 하면서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하곤 했다. 박 대통령은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를 피아노를 치면서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건 어쩌면 정치에서 이룩해 보고자 하는 이상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야인(野人) 시절인 70년 유럽여행 때 스웨덴에서 목격한 게 있다. 88세의 연로한 국왕 구스타브 6세(1882~1973)가 소년 오케스트라에 끼어 클라리넷을 불고 있었다. 국가 지도자가 국민과 하나가 되어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 인물 소사전 김생려(金生麗· 1912~95)=바이올리니스트 겸 예그린 악단 초대 지휘자. 예술원 회원. 평북 영변 출신. 작곡가 현제명(玄濟明)의 권유로 연희전문 에 입학해 홍난파 선생을 사사(師事)했다. 1945년 ‘고려 심포니’(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 단장과 50년 해군 정훈음악대장을 지냈다. 76~92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필하모니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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