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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메르스가 폭로한 권력의 누아르

중앙일보 2015.06.15 00:48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사회2부장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194X년 프랑스 도시 오랑에서 벌어지는 전염병과의 전쟁을 그리고 있다. 4월 16일 죽은 쥐들이 쏟아져 나오고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시 당국은 ‘죽은 쥐 수거’만 지시한다. 방역소가 나서야 한다는 의사 리유의 요청에 방역소장은 이렇게 답한다.



 “‘명령이 있어야 그렇게 하지.’ 메르시에가 말했다…시 당국은 자진해서 무엇을 해볼 생각도 전혀 없었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논의를 위해 일단 회의부터 소집하기로 했다.” -26쪽, 열린책들



 2015년 6월 대한민국.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이 실패한 데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투명한 정보 공개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카톡’ 소리를 타고 병원 명단과 메르스 확산 지도가 전파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왜 의미 없는 비공개 원칙에 집착한 것인가. 명령이 없었기 때문인가.



 “조치들은 허술했고 여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욕심에 상당부분 포기한 것 같았다… 실제로 우려할 만큼 충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시민들이 냉정을 잃지 않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71쪽



 ‘익히지 않은 낙타 고기 를 먹지 말라.’ 예방수칙은 극소수 미식가를 위한 것이었다. 병원·시민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체계적인 방역 매뉴얼로 불안을 불식시켜야 할 골든타임에 정부는 괴담 대응 매뉴얼을 펴들었다. 관료들은 감염 확률이나 치사율 같은 통계수치들을 나열하며 ‘합리적 태도를 잃지 말라’고 훈계했다.



 “이렇다 할 신념도 없이 공무 집행하듯 했었지요. 그들(관리들)에겐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재앙에 맞설 수준들이 아닙니다. 짜낸 해결책은 고작 코감기 수준에 불과해요.” -161쪽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대책엔 ‘서민의 삶’이 빠져 있었다. 세종시와 충북 오송에서 일하는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 실무자들은 대도시 시민들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고위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승용차 뒷좌석 시트에 기대 정부 청사와 국회, 고급 식당 사이를 오갔다. 병원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어쩔 수 없이 밀접 접촉하며 들숨 하나, 날숨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민의 불안이나 분노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고령·중증 질환이 아니면 괜찮다는 투의 발표는 또 무엇인가. 고령자와 중증 질환자는 어찌돼도 할 수 없다는 뜻인가.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 예를 들어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 등은 이를테면 의지, 그러니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의지의 산물이죠.” -324쪽



 그렇다. 병균과 부패, 관료주의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각심과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그런 것들에 잠식되고 만다. 관료들이 위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 정윤회 문건, 성완종 리스트를 거치며 스스로를 여론에서 ‘자가격리’시켜 왔다. 그 결과 메르스는 궁궐 밖 먼 곳에서 풍문으로 떠돌았다. 권력 내부의 폐쇄주의가 사태를 더 곪아터지게 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든 상황이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327쪽



 메르스가 폭로한 건 공감이 빠진 채 공회전하는 권력의 누아르다. 권력 운용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위험은 확대 재생산된다. 페스트가 변두리에서 시작됐듯 돈 없는 자, 힘없는 자들부터 희생될 것이다. 메르스는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경고다. 『페스트』의 마지막은 암울한 묵시록에 가깝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96쪽



권석천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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