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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힘들 때 더 안 보이는 대통령

중앙일보 2015.06.15 00:46 종합 31면 지면보기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 사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을 보면서 문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지 6세는 1936년 그의 형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와의 결혼으로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예상치 못하게 즉위하게 됐다. 그런데 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은 독일군의 직접적인 침공에선 벗어나 있었지만 공중폭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주변에서는 국왕이 캐나다 등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 6세는 이러한 요구를 물리쳤고 런던의 버킹엄궁전에 머물렀다. 40년 9월 7일 런던 지역에 대한 독일의 첫 공습이 있었는데 이스트엔드(the East End) 지역의 민간인 약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9월 13일 버킹엄궁전 앞마당에도 독일군의 폭탄이 투하됐다. 당시 거기에 머물렀던 조지 6세 부부는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죽을 뻔했던 상황이었지만 왕궁이 폭격된 뒤 왕비는 오히려 “나는 우리가 폭격을 받아 기쁘다. 그 폭격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독일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본) 이스트엔드 분들에게 면목이 서게 됐다”고 말했다.

왕실은 전쟁 중에 위험과 고통을 국민과 공유했고, 힘들어하는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국왕은 독일군 폭격으로 피해를 본 지역을 방문했고, 군수공장을 찾아가 격려했다. 심지어 전장인 노르망디를 포함한 해외의 여러 영국 군기지도 방문했다. 왕실은 전시의 부족한 물자로 인한 배급제도에 동참했고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았으며 창문을 판자 등으로 가려 추위를 견뎠다.

전쟁 중 이처럼 국왕은 국민과 똑같이 고통과 어려움을 나눴고, 그로 인해 국왕은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국민적 항거와 통합의 상징이 됐다. 마침내 연합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시민들은 왕궁 앞으로 몰려와 국왕을 외쳤고 왕실 가족은 버킹엄궁전 테라스에서 이들과 승전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보여 줘야 할 전범(典範)을 조지 6세는 보여 준 것이다.

 전쟁만큼의 상황은 아니지만 최근의 메르스 사태도 분명히 국가적 위기다. 이미 전국 대다수 지역으로 병마가 확산됐고, 감염자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수그러드는 기색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으며, 관계 당국이나 병원이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믿음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라도 어디에서든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극도로 고조돼 있다. 대규모 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적인 소규모 행사도 연기되거나 취소돼 길거리는 한산해졌다. 동네 병원조차 가기를 꺼리고 외국 관광객이 찾아오지 않아 관련 업계 역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감염환자나 의료진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가적 재난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에게서 이런 위기감이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메르스 사태 초기의 느슨하고 안이한 조치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박 대통령의 대응방식은 매우 행정적이고 실무적으로 보인다. 국민의 어려움과 위기감을 이해하고 있고 또 함께하려 노력한다는 인상보다는 오히려 건조하고 형식적이다. 통제본부나 병원을 찾아가 관계자로부터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거나 혹은 환자와 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에서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국민 사이에 고조된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여전히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국민이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하도록 이끄는 최고지도자의 용기와 감동을 찾을 수 없다.

 옛날 가뭄이 극심해 백성의 피해가 커지면 왕은 수라상을 받지 않고 삼베옷을 입고 거적때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물론 왕이 이런다고 해서 비가 내릴 것이라는 보장은 예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다. 과학이나 행정의 시각에서 볼 때 왕이 나서는 기우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 왕이 직접 나서 백성의 근심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제로 비가 내리는 여부와 무관하게 중요한 일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하락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부의 미숙하고 무능한 대응에 따른 국민의 실망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은 단순히 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설사 실무적인 대응에 실패했더라도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같이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모두가 힘들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이런 때 더욱 절실한 대통령의 위로와 공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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