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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세월호·메르스는 우리 사회 연륜이 부족하다는 반증

중앙선데이 2015.06.14 03:41 431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는 오늘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로 묶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감염된 한 사람의 병이 100여 명으로 퍼지고, 환자 접촉이 있었던 4000여 명이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급격한 메르스 확산은 정부와 병원 그리고 의료 관리 체제가 잘못된 때문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이번 일과 관련하여 한국 경제가 적지 않게 후퇴하리라는 해외 언론의 보도도 있다.

<18>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좋은 정부 체제란 국민이 모두 악마라고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게 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체제라는 정치적 견해(칸트)가 있다. 그것은 강압적인 통제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힘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잘 짜인 체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들의 준법국가는 민주주의 체제를 논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질서 정연한 국가라고 해서 국가와 국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질서 안에서도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있어서 법의 시행·집행·준수를 매개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닐 수 없다. 악마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언급된 국가 질서와의 관련에서는, 모든 국가 성원이 책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는 국가나 사회의 질서는 그 안에 살아야 하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개인들 하나하나에 의하여 지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은 약한 존재이니만큼 나쁜 체제 속에 그 책임이 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와 닮은 공황상태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소설 『페스트』는 작은 발병에서 시작하여 전 사회를 휩쓴 전염병 페스트로 인하여 공황상태에 빠진 알제리의 도시 오랑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의 일과 현실의 사태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메르스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도 비슷한 공황상태가 아닌가 한다. 여러 가지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 소설을 간단히 요약할 수는 없지만, 사태의 전개만을 보면 『페스트』에 묘사된 일들은 오늘의 메르스 사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

소설의 처음에 나오는 쥐들의 떼죽음이 전조(前兆)가 되기는 하지만, 역병이 시작되는 것은 그 사태를 회고하고 기록한 의사 류의 아파트 관리인 미셸이 고열로 고통받다가 죽게 되는 일부터다. 류는 그 원인이 페스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시장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시장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또 그 사실을 공표하는 것은 공연히 시민들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일을 묵살한다. 그러나 환자가 가속적으로 늘어나자, 전염병 환자 병동이 설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표문은 낙관적인 전망을 강조한다. 확산하는 페스트때문에 병상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많은 환자들이 자택 격리 조치를 받고, 도시 전체가 출입이 금지된 역병의 옹성(甕城)이 된다. 그리하여 오랑에 왔던 사람들은, 돌아가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도, 도시를 떠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비밀 루트를 통하여 도망갈 궁리를 하다가, 결국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일들을 두고 떠나갈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자기 일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의사 류와 더불어 구조 활동에 나선다. 그러다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기도 한다. 물론 상황이 위급한 것을 이용하여 그것을 과장된 설교의 자료로 삼고, 돈을 벌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 활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카뮈가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영웅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놓이게 된 상황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이 빠져들게 된 상황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은 마치 순교자가 될 것처럼 스스로 떠맡은 일에 헌신한다.

심각성에 직면하고 싶지 않는 관료적 타성
카뮈가 그리고 있는 오랑의 페스트 사태가 우리의 메르스 상황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가 부질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처음에 사태의 심각성 인정을 보류하고자 하는 행정관리의 태도는 우리의 사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취하는 태도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발병을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작게 시작하여 확대되는 일의 전개를 처음부터 예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응 조치가 늦어지는 것은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준비 부족이란 담당자들에게 가지고 있었어야 할 역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사태를 과장하여 시민들의 불안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 진심일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그러한 결정에는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사태의 심각성에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관료적 타성이 작용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어느 쪽으로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처음에 사태 확인과 발표를 꺼린 것은 대형 병원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것은, 수익이 모든 일의 판단과 행동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환자들이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뺑뺑이 돌림을 당한 것도 이러한 손익 계산에 관계되는 일은 아니었을까? 뺑뺑이 돌림은 환자 자신의 계산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전염병 환자가 다른 병원에 갔었다는 것을 감추고 이곳저곳 또 여러 도시로, 고향으로 돌아다니고 하는 일은 사실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감염이야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가?

우리의 병원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도 있다. 가령, 혼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대형 병원의 병실 광경이다. 거기에서 2차, 3차 감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입원환자가 있으면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수시로 출입한다. 또 환자를 돌보고 뒤치다꺼리를 맡는 사람은 환자의 가족이다. 어떤 설명은 한국 사람의 두터운 가족 간의 정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간호 비용을 절감하려는 의도가 끼어든 것은 아닐까? 병원에서 참으로 환자를 잘 돌보고 엄격하게 관리한다면 환자 치료에 폐가 될 정도로 가족들이 병실에 들락거릴 것인가?

나는 큰 병원에 근무하는 한 지인 의사에게 하루에 몇 사람의 환자를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은 일이 있다. 그의 대답은 7~8명 정도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가 대하는 환자는 그 10배였다. 지역의 소(小)병원과 대(大)병원의 관계를 규율하는, 다른 나라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체제가 있다면, 폭주하는 병실 교통이 조금이나마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 데에는 다시 손익 계산 문제와 군소 병원에 대한 신뢰 문제가 있을 것이다. 큰 것일수록 좋고, 높은 것일수록 좋고, 직함이 높을수록 좋은 것이 우리의 사회 문화이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개인의 책임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일일 것이다. 사회신뢰도가 극히 작은 곳이 우리 사회다.

최근 영국의 BBC 인터넷 채널에 나이지리아의 최대 도시 레이고스의 소방 시설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필요와 체제 사이의 불균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거기에 보도된 것에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황당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 독재정권에 시달려온 나이지리아를 동정하게도 되고,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형편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게도 된다. 이 보도에 의하면 레이고스에서는 유조차 화재가 빈번하다. 그로 인하여 주변의 주택들이 수십 채 씩 타고 무너지기도 한다. 소방대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가 2000만에 이르는 레이고스에 소방서는 13개뿐이다. 월급이 형편없이 적은 운전사는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차를 함부로 몰다가 화재를 일으키는 수가 많다. 또 소방차는 어떤 때는 소화용 물도 싣지 않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간다. 유조차에 화재가 나면 그것은 주변의 주민들에게 주변 상점을 약탈하는 기회가 된다. 어떤 때는 소방수가 화재 현장에 너무 늦게 왔다고 폭행의 대상이 되고 다른 때는 불을 너무 일찍 꺼서 상점 약탈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불만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공동체의 일과 그에 대한 책임, 정치와 행정의 체제 사이의 간격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

질서 정연한 자유민주사회가 되는 길
물론 이러한 것들을 너무 간단히 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다른 일과 관련하여, 나는 공산권 붕괴 이후 동구권에서 지속되는 혼란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 에른스트 오토 쳄필 교수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설명은 관대한 것이었다. 헝가리·체코·폴란드와 옛 유고 지역의 혼란상은 새로운 제도가 태어나기 위한 과도기 현상이라고 한다. 한 사회가 일정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질서 정연한 자유민주사회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히 그러한 조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쳄필 교수는 이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의 혼란에도 해당되는 일이라고 한다. 자유와 질서의 체제를 연결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질서의 체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게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어떠한 것도 지키지 않는 것이 자유이다. 두 개가 하나가 되려면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는 법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심성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도덕의식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도덕은 자유의지의 자율에 일치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뜻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질서가 있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그것은 개인의 단호한 결단을 요구한다. ‘관행’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을 보면 그러한 환경에서는, “이 일이 옳은 것인가” 물으면서 사안 하나하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결단하여야 한다.

그러나 좋은 체제의 형성은 긴 시간을 요구한다. 구미의 이름난 대학들을 더러 돌아보고 나는 유명한 대학들이 대개는 최소한 200년 이상의 오래된 대학이라는 사실을 놀랍게 생각한 일이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경험한 일이지만 이번의 일에서도 우리들의 민주사회의 연륜 그리고 책임 있는 삶의 연륜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메르스의 문제도 해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속도와 적절성은 사회적 성숙의 속도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무책임한 일들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책임한 사회일수록 책임을 아는 사람의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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