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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원 경력 장칭, 정보 틀어쥔 뒤 반대파 숙청

중앙선데이 2015.06.14 03:44 431호 29면 지면보기
옌안 시절, 캉성(오른쪽)은 장칭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문혁 기간 장칭편을 들었지만 사망 직전엔 장칭을 제거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왼쪽은 4인방의 일원인 부총리 장춘차오, 1969년 가을,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들은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바다와 강에 인접한 도시와 마을들이 전화에 휩싸였다. 전쟁을 위해 국·공 양당이 손을 잡자 온 중국이 들썩거렸다. 지식청년들은 전시수도 충칭(重慶)과 홍색 근거지 옌안(延安), 두 곳 중 어디를 택할지 고민했다. 꿈 많은 젊은 지식인들은 무리를 지어 옌안으로 향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0>

10년간 내전을 치르며 손실이 컸던 중공은 숨통이 트였다. 농민들로 구성된 당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제 발로 찾아온 지식청년들을 환대했다. 후속 조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앙당교와 항일군정대학 외에, 예술가와 연예인 배출을 목적으로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을 설립했다. 극단도 만들었다.

중공은 소련공산당을 모델로 삼다 보니 정치공작과 정보공작을 중요시했다. 창당 초기부터 소련에 당원들을 파견해 특수 공작원을 양성했다. 1937년 11월, 소련에 있던 캉성(康生·강생)이 옌안으로 돌아왔다. 중국 고전에 정통했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정보와 공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30년대 초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함께 상하이에서 ‘중공중앙특과’를 이끌며 수많은 암살 사건을 지휘했던 캉성에게 중국 현실에 맞는 정보기관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적대세력 공작원 진압과 옌안에 잠복한 국민당 첩자를 색출해라. 공산당원 중에도 반대파가 많다. 사상이 수상한 당원도 한둘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해라.”

캉성은 ‘중보위(중공 중앙 보위위원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보안이 철저하고 진압 방법도 무시무시했다. 마오에게 “소련에서 배운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기법을 발명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1 옌안의 장칭과 마오쩌둥. 1942년 무렵으로 추정. 2 쑨웨이스(오른쪽)는 저우언라이 부부의 공인된 수양딸이었다.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캉성의 중보위는 옌안에 유입된 지식청년들을 방심하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를 실시했다. 공산당원이건 아니건 예외가 없었다. 가족들의 성향과 개인 경력, 주변 인물 등을 샅샅이 뒤졌다. 심문도 처형도 극비리에 해치웠다.

중보위는 약점 잡힌 사람들을 포섭해 각 조직에 심었다. 이들을 강원(綱員)이라고 불렀다. 캉성은 마오쩌둥의 눈에 든 장칭(江靑·강청)을 루쉰예술학원에 강원으로 파견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상하이 시절 추문이 그치지 않았다. 과거와 단절을 갈망하는 것이 장점이다. 연예인들은 무대와 현실을 구분할 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장칭은 이들과 접촉이 수월하다.”

장칭은 루쉰예술학원 학생과 직원들의 일상생활과 언행을 감시했다. 매주 한 번씩 보고서를 작성했다. 강원 생활은 5개월에 그쳤지만 얻는 게 많았다. 당 고위층과 접촉하기가 수월하다 보니 마오쩌둥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마오는 장칭에게 집착했다. 장칭이 사인을 요구하면 “나는 네 사인을 받고 싶다”며 가벼운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캉성을 제외한 중보위의 상급자들은 눈치가 없었다. 툭하면 실적이 신통치 않다며 장칭에게 면박을 줬다. 상하이 시절, 함께 연극에 출연했던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는 더 가관이었다. 혁명 열사의 딸이며 저우언라이의 양녀였던 쑨웨이스는 가는 곳마다 공주 대접을 받았다. 대놓고 장칭을 무시하며 아래로 봤다.

1938년 8월,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장칭을 판공실 비서에 임명했다. 장칭은 루쉰예술학원을 떠났다. 펑황산(鳳凰山) 기슭의 중앙군사위원회로 거처를 옮겼다. 마오의 정보비서였던 예즈룽(葉子龍·엽자용)의 회고를 소개한다.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마오쩌둥이었다. 장칭은 마오의 비서나 마찬가지였다. 장칭은 중앙군사위원회에 온 날부터 주석과 한 방에서 생활했다. 더 이상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연출은 계속했다.”

한때 장칭을 부하로 거느리던 중보위 출신도 회고를 남겼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원 생활은 장칭의 사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칭은 감시와 조사에 능숙했다. 문화계와 학계의 동향을 꿰뚫고 있었다. 공산당과 사회 각계 인사들의 일거수 일투족도 장칭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날의 남성편력을 들춰내며 마오와의 결혼에 반대한 사람과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선포했다. 문화부의 한직(閑職)을 차지한 장칭은 말로만 퍼스트레이디였다. 전면에 나설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문혁을 계기로 장칭은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섰다. 이번에는 연극무대가 아닌 역사의 무대였다. 마오의 후광으로 하루아침에 ‘당과 국가의 중요한 영도자’로 등장하자 자신의 빛나는 역사를 만들기에 골몰했다. 거대한 권력을 이용해 과거를 아는 당 간부와 문화인, 왕년의 정보공작 책임자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도망간 사람은 끝까지 추적해 감옥으로 보냈다. 환락을 함께했던 남자들도 성치 못했다. 동성들에게 가한 보복은 더 가혹했다. 한때 경쟁상대였던 왕잉은 죽는 날까지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시신도 사망과 동시에 소각해버렸다.

쑨웨이스의 운명은 더 비참했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건 말건, 발가벗겨 놓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팼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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