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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문화재 원작 훼손한 5만 원 권 디자인

중앙선데이 2015.06.14 03:47 431호 29면 지면보기
1 이정(1554~1626) ‘풍죽’, 비단에 수묵. 127.5×71.5㎝ 2 이정의 ‘풍죽’과 어몽룡의 ‘월매도’가 담긴 5만 원 권 뒷면. [사진 간송미술관·중앙포토]
금품 수수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욕보는 지폐가 5만 원 권이다. 다양한 상자와 봉투에 담겨 은밀하게 전달되거나 지하로 숨어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지폐 앞 면에 그려진 신사임당은 졸지에 어둠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한국 지폐에 등장한 첫 여성의 명예가 무색하다.

뒷면은 할 말이 더 많다. 문화재가 소재인 관례에 따라 조선 중기 묵죽화가인 이정(李霆)의 ‘풍죽’과 선비화가 어몽룡(魚夢龍)의 ‘월매도’가 겹쳐서 그려져 있다. 그림을 아는 이들은 이 지폐 디자인이 원작을 얼마나 심하게 망가뜨렸는지 할 말을 잃을 정도다.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간 나무를 가로로 눕혀 놓은 데다 보름달 위치를 바꾸고 가지를 처 버려 원본과 거리가 먼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위조 방지, 화면 효과 등 지폐 디자인이 갖추어야 할 요구 조건을 감안해도 훼손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정의 ‘풍죽’이 마침 전시중이니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이 지난해 3월부터 첫 외부 전시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간송문화전’의 제4부 ‘매·난·국·죽-선비의 향기’(8월 30일까지)다. 간송 소장품 중 매화·난초·국화·대나무를 그린 사군자(四君子)가 100 여 점 나왔는데 ‘풍죽’은 출품작 중 으뜸이라 독립된 전시실에서 따로 감상할 수 있다.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30대부터 묵죽화(墨竹畵)의 대가로 이름날 만큼 재능을 타고난 화가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팔이 거의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었으나 시련을 이겨내고 더 빼어난 솜씨로 『삼청첩(三淸帖)』을 남긴다. 삼청은 ‘세 가지 맑은 것’이란 뜻으로 송죽매(松竹梅)를 가리킨다.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된 이 화첩은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사라질 위기를 넘겼고, 임오군란 와중에 일본인 함장 손에 넘어간 것을 간송 전형필(1906~62)이 되찾아 온 역사적 무게를 지녔다.

풍죽(風竹)은 바람에 맞선 대나무라는 뜻이다.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 자신의 인생사뿐 아니라 외세에 시달리는 조선의 운명까지를 함축한 대나무의 강직함은 그림 앞에 선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런 걸작을 지폐 속에 흐릿하게 밀어넣은 건 문화재에 대한 모욕이라 할 수 있다.

‘풍죽’ 양쪽에 전시되고 있는 차동훈 작가의 비디오 작업 ‘풍죽예찬’은 탄은이 대나무를 바라보며 느꼈을 심정과 감흥을 되살렸다. 400여 년 시공을 뛰어넘어 조우하고 있는 대나무 바람이 전시실 안을 휘돌고 있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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