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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리·재정만으론 위기 못 넘어 … 구조개혁만이 살 길

중앙선데이 2015.06.14 00:10 431호 3면 지면보기
“국내 상황을 보면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성장동력이 더욱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 경제의 회복세 지속을 낙관하기 어렵다.”

경제 먹구름 신흥국으로 이동

12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부에서 열린 창립 65주년 기념식. 둔화, 위축, 약화, 부진, 위험…. 반세기 넘는 한은의 역사를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이주열 총재가 한 기념사는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했다.

바로 전날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연 1.75%에서 1.5%로 인하했다. 사상 최저다. 이 총재는 지난해 4월 취임 이후 네 차례 금리를 낮췄다. 지난해 8월과 10월 그리고 올해 3월과 6월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서 올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까지 한은의 금리 인하를 재촉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가뜩이나 면역력이 약해진 한국 경제는 갑작스러운 변수에 크게 출렁였다. 이 총재는 “메르스 사태 추이, 그리고 그 파급 영향이 아직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경제주체의 심리와 실물경제 활동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미리 완화하기 위해선 선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금리 인하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이번에 금리를 내릴 때 메르스만 가지고 판단한 건 아니다”고 강조했다. 2.5%였던 기준금리는 1년 새 1.5%로 내려갔다. 금융위기 때 썼던 금리(2%)보다도 0.5%포인트 낮다. 한은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감지했다는 의미다.

경제 성장엔진,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경제에 먹구름이 밀려오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신흥국의 경제 기상도가 흐려지고 있다. 세계은행은 10일(현지시간) 수정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Global Economic Prospects)’를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고서의 핵심은 ‘신흥국의 구조적 침체’라고 지적했다. 거듭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10년 가까이 선진국에 드리웠던 경제 먹구름이 신흥국으로 대이동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세계은행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관측치를 3.0%에서 2.8%로 낮췄다. 특히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 전망을 어둡게 봤다. 올 초 4.8%로 예상했던 신흥국 성장률 예측치를 4.4%로 0.4%포인트나 내렸다. 미국·유럽연합(EU)·일본 같은 선진국이 풀어놓은 대량의 달러화, 유로화, 엔화를 연료 삼아 달려왔던 신흥국 열차에 ‘더 이상의 연료 공급은 기대 말라’는 지적이었다.

신흥국 성장이 둔화한 이유는 원유 같은 원자재의 가격 하락에다 교역 감소 등이 겹쳐서다. 특히 원자재 가격 하락은 신흥국의 성장 페달에 브레이크를 건 핵심 요인이다. 중국이 내수 중심의 신창타이(新常態)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원자재 수요가 크게 줄고 있다. 원자재 수요가 늘지 않으면 신흥국 성장의 엔진을 달구기 힘들다.

반면에 선진국 경제는 점점 호조를 띠고 있다. 경제 회복에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달러화 풀기(양적완화)를 일찌감치 끝냈고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정책금리를 곧 높여 달러를 회수하겠다고 예고했다. 지난해 0.9%에 불과했던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성장률도 올해 1.5%로 뛰어오를 것으로 세계은행은 보고 있다. 일본 경제는 올해 1분기 1.0%(전분기 대비) 성장해 한국(전분기 대비 0.8%)을 추월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엔화가치가 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엔저(엔화 약세)에 더 이상 기대지 않아도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선진국 경제의 회복세가 뚜렷해지면서 세계은행은 이례적으로 신흥국 경제에 미치는 충격의 강도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 시점을 늦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미국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해 장기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신흥시장으로의 자본 유입액은 지금보다 18∼40% 감소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진국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양적완화 같은 돈 풀기 영향도 있지만 구조조정의 힘이 컸다. 미국과 일본 제조업이 살아나는 배경에는 뼈를 깎는 구조개혁이 있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힘들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구조조정이라는 큰 과제를 실천했기 때문에 선진국 경제에 생기가 도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개혁은 한국 경제에도 시급하다. 지난 4월 한은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1%로 낮췄다. 지난해 12월 전망 때보다 0.3%포인트 내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불과 두 달 만인 지난 11일 이 총재는 “현재의 흐름으로 봐선 4월 전망치에서 조금 하방 요인이 생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2%대 하향 조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해외 투자은행(IB)에선 벌써 한국 경제성장률이 올해 2%대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유나이티드뱅크오브스위스(UBS)는 2.9%, BNP파리바는 2.7%, 노무라증권은 2.5%로 각각 예상했다.

한국, 추경 편성도 근본 해결책 안 돼
마크 월튼 BNP파리바 이코노미스트는 “엔저 기조가 수출의 발목을 잡고 있고 가계부채가 높아 소비가 위축돼 있는 데다 메르스 위험까지 겹쳤다. 향후 한국의 경기회복은 더뎌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이미 한국 경제를 이끄는 두 바퀴에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수출은 두 자릿수(퍼센트)나 감소했고 내수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1100조원이 넘는 가계 빚에 소득, 소비, 실업 어느 하나 낙관적인 수치가 없다.

외환위기 방파제로 꼽히는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액 숫자만 보고 안심할 상황도 아니다. 한국은 올 4월까지 38개월 연속 경상수지에서 흑자를 냈다. 최장 기록에 올해 경상흑자 1000억 달러 돌파를 기대하는 전망도 나온다. 대규모 경상흑자를 바탕으로 올 5월 기준 3715억1000만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쌓을 수 있었다. 역대 최고액에 세계 6위 수준이다. 그런데 경상흑자의 성격이 문제다. 수출이 감소하는데 수입이 더 많이 줄어드는 ‘불황형 흑자’다. ‘잃어버린 20년’에 들어서던 20년 전 일본이 꼭 그랬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한국 경제 상황을 숭례문 화재사건에 비유했다. “서까래와 지붕을 뜯어내고 불탄 기둥을 부수는 것과 같은 구조개혁 없이는 안에 숨은 불을 절대 끌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물(금리 인하와 재정 투입)을 쏟아부어도 잠깐 고일 뿐 바로 옆으로 흘러내려 화재(경제 위기) 진압엔 도움이 안 된다.” 기재부가 추가경정예산을 비롯한 대규모 재정 투입을 검토하고 나섰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재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 윤경제연구소장은 “금리를 0.25%포인트 낮춘다고 해서 없는 일자리, 줄어든 소비 여력, 수출 부진, 침체한 기업 투자수요를 일거에 살릴 수 없다. 현 시점에서 경제 구조조정, 체질 개선을 서둘러야 하는데 정치·행정·노사 모두 걱정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추가경정예산 줄여서 ‘추경’이라고 부른다. 회계연도가 시작된 이후 불거진 돌발 변수를 이유 삼아 추가로 예산을 편성해 집행하는 걸 말한다. 국가재정법에서 추경 편성 요건을 전쟁, 대규모 재해, 경기 침체, 대량 실업, 남북관계 변화 등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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